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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의 자전거 라이딩 2 - 만휴정

by 깜쌤 2011. 8. 31.

 

예전에는 이 부근을 송암동이라고 불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만휴정 밑의 작은 폭포를 어떤 이는 송암(松巖)폭포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작은 개울 건너편에 세칸짜리 정자가 보입니다. 저 정자가 만휴정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물 만(晩)에 쉴 휴(休)자를 넣은 것으로 보아 늘그막에 쉰다는 의미를 가진 정자일지도 모릅니다.

 

 

정자가 자리잡은 위치가 절묘합니다. 개울 위쪽으로 작은 폭포가 하나있고 아래쪽으로도 폭포가 하나있는데 그리 높지를 않으니 물소리가 독서를 방해할 정도로 세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적당하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건너가기 위해서는 외나무 다리를 지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낮은 흙담 중간중간에 돌들이 박혀있는데 그 아래부분은 돌들로만 축대를 쌓아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외나무다리가 끝나는 곳에 정자로 들어가는 쪽문이 열려있었습니다. 

 

   

"응, 그래. 정자가 하나있네. 와! 멋지다."는 식으로 감탄사를 연발하고는 쓰윽 눈길 한번 주고 카메라 셔터 한번 누른 뒤 후딱 돌아서는 그런 여행을 나는 엄청 싫어합니다. 찬찬히 둘러봅니다.    

 

 

담장 끝머리 안쪽에는 배롱나무 한그루가 꽃을 달고 서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개울의 모습이 절묘합니다. 개울을 흘러온 물은 폭포로 떨어지기 전에 작은 소에 일단 머무른 뒤 넘쳐흐르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되면 흘러들어온 만큼만 넘쳐나가게 됩니다. '차면 넘친다'는 자연법칙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도록 된 곳이라고나 할까요? 저 작은 소는 만휴당 주인의 전용 목욕탕 구실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쪽에도 작은 소가 하나 자리잡았습니다. 이 작은 골짜기안에 기가 막힐 정도로 예쁜 소가 2개나 자리매김을 했으니 이런 곳에 정자를 짓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제 다리를 건너가봅니다. 통나무로 만든듯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시멘트가 없었으니 통나무를 걸쳤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리 중간에 서서 다시 한번 아래쪽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치 내가 만휴정의 주인이 된듯 합니다. 실제로 제가 여기를 방문했을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일시적이나마 주인역할을 한 것이라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실제 소유주가 어느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나그네를 위해 쪽문을 열어두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쪽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다시 한번 정자를 살펴보았습니다. 후딱 들어가지 않고 뭐하느냐고 재촉하고 싶어도 잠시 참으십시다. 조금 천천히 들어가도 늦지 않습니다.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담벼락에는 담쟁이들이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흙담에 붙은 담쟁이들이라.... 운치가 넘칩니다.

 

 

드디어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이 한국적인 매력 아닐까요? 황토담장위에 단정하게 얹혀진 기왓장과 검은 빛이 감도는 칙칙함으로 가득한 목재건물이 주는 고아함 말입니다. 담장 밑에는 푸른 이끼들이 묻어있었습니다.

 

 

화장실은 또 어떻고요? 마당에는 기왓장에서 떨어진 빗물들이 파놓은 자욱들이 선명했습니다.

 

 

옆모습도 단아했습니다. 중국지붕들처럼 지나치게 하늘로 말려올라간 것도 아니고 일본지붕들처럼 밋밋하지도 않으니 단아하게, 그러면서도 날렵하게 보입니다. 이쯤되면 정자를 만든 주인의 안목이 어떠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 싶습니다.  

 

 

정면에서 보면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온돌방이 각각 한칸씩 자리를 잡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면에서 보았을때 왼쪽 방문 위에 작은 편액이 하나 달려있었는데 원판 사진을 가지고 확대해서 확인해보았더니 문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吾家無寶物(오가무보물)

 寶物惟淸白보물유청백)'

 

                     내 집에는 보물이 없소이다. 다만 있다면 맑고 깨끗함이오.

 

 

인터넷으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만휴정의 주인은 조선시대 전기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보백당 김계행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마흔아홉에 대과에 급제해 쉰이 넘어서서 비로소 벼슬길에 나갔다고 합니다. 가운데 마루에 걸린 편액에는 쌍청헌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껴 그전부터 사직서를 내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나서 70이 넘은 후에 원래의 고향인 풍산으로 돌아와 머물다가 나중에 이곳에 만휴정을 짓고 아흔 가까운 연세로 돌아갈때까지 거처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전기의 청백리였다고 하니 그 어른의 인품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자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화려함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루에는 돌아가며 난간을 둘렀습니다.

 

 

정면에서 보았을때 오른쪽, 그러니까 동쪽방문 위 편액에는 持身謹愼(지신근신) 待人忠厚(대인충후)라는 글이 들어있었습니다.  '겸손과 신중함으로 몸을 지키며 충성스럽고 후한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섬기라'는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을까요?

 

 

정자로 들어오는 쪽문에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듯한 미루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나무도 위로만 솟아오르는 나무이니 만휴당의 주인성품과 잘 어울리지 싶습니다.

 

 

 

마루에 걸터앉아 바람이라도 조금 쐬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깔따구와 모기와 날파리들의 성화가 너무 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귀한 문화재의 출입문을 열어두신

주인어른의 열린 마음가짐을 생각해서라도 겸손하게 물러나와야 했습니다.

 

 

나는 들어왔던 다리를 다시 건넜습니다.

 

 

잘 표시가 나지 않지만 개울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보였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붙잡는다는 느낌이 들법도 한 그런 곳입니다.

 

 

정자한켠의 배롱나무만이 나를 배웅해주는듯 했습니다.

 

 

형편이 된다면 늦은 가을에 다시 한번 더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리 건너 길에서 본 모습입니다. 아무리 봐도 단아함 그자체입니다.

 

 

골짜기 길을 따라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널찍한 바위가 나옵니다.

 

 

너럭바위가 끝나는 곳에 다시 얕은 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경사진 바위를 따라 흐르는 개울물이 주변 경치를 한결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듯 합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만휴정이 있는 작은 계곡을 벗어났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