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로 유명한 경북 의성에서 경주까지 오는 길은 예상외로 간단하다. 군위군과 영천군을 구별하는 갑티재라는 큰고개 하나를 넘으면 거의 끊어짐 없이 경주로 연결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중간에 작은 고개들이 서너개 있긴 하지만 조금만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보면 옛적에도 넘어가는 통로를 찾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경주와 의성사이의 길은 기차를 타고 수십년을 다녔으니 눈을 감아도 지형이 환하게 떠오르기에 내가 이렇게 단언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의성에서 안동까지 연결되는 길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이(卷二)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조에 '三年春正月親祀如祖廟大赦二月 拜坡珍 仇道 一吉 仇須兮 爲左右軍主 代召文國 軍主之名 始於比'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고전 번역사이트에 들어가서 검색을 해보면 원문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 문제는 해석인데 한자실력이 짧기에 남이 해석해놓은 것을 인용해 왔다.
한자로 기록돤 부분의 뜻은 다음과 같다.
‘벌휴이사금 1월에 왕이 친히 시조사당에 제사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으며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로서 좌우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정벌했는데 군주라는 이름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벌휴이사금이라는 분은 신라의 9대 임금이니 그가 임금자리에 오른지 2년이 된해라 서기 185년경이 된다고 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는 조문국이라는 나라의 도읍지로 약 상당한 수(다른 참고자료에 의하면 260여기)의 옛무덤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때 한때는 제법 강했던 세력이 터잡고 살았음을 짐작해볼 수 있겠다.
1960년 11월에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박사를 중심으로 하는 발굴팀이 조문국의 고분1기를 발굴한 결과 무덤속에서 금관이 출토된 사실이 있다고 한다. 고분 가운데 이름이 남아있는 것은 경덕왕릉(景德王陵) 정도이다. 신라의 경덕왕과는 다른 분이다.
조문국의 고분이 남아있는 이 곳은 작약이 아름답게 피는 곳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하다. 작약꽃은 모란과 비슷하지만 모란이 나무성질을 강하게 지닌 식물이라면 작약은 초본(草本)의 성질이 강하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꽃의 크기와 우람하기로는 모란이 한 수 위이고 색채감이 아름답기로는 작약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작약이 얕은 능선을 따라 즐비했다. 여기에 서서 보면 대구부근의 명산인 팔공산이 환하게 보인다. 즉 팔공산 밑까지는 골짜기가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팔공산 줄기가 갑티재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갑티재를 넘어서면 영천이고 영천과 아화사이의 얕은 고개를 넘어서면 경주땅이니 신라의 군대가 조문국으로 진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연구자료에 의하면 여섯부락이 힘을 합쳐 신라를 건국할 당시 경주지역 인근의 인구는 적으면 5천명 정도, 많으면 약 3만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세종대왕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가 약 5백만이었으며 일제강점기때의 인구가 이천만명 정도였으니 산술적으로도 충분히 근거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조문국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이 지금부터 약 1800여년전의 이야기라고 볼때 조문국으로 진격한 신라의 군대는 천단위 정도가 아니었을까? 만명 단위의 군대는 결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가 멸망한 것이 서기 660년의 일이었는데 당시 동원된 신라군이 5만명 정도였다니 그 정도면 힘을 쓸 수 있는 어지간한 남자는 거의 모두가 전쟁터로 징집되어 갔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대구 부근 경산에 자리잡은 압독국, 울릉도의 우산국, 강원도 삼척 부근의 실직국은, 조문국을 침입한 신라군에 의해 정벌당하거나 멸망당한것 처럼 신라의 세력에 의하여 정복되었거나 합병되었거나 굴복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작약꽃이 저버린 길을 걸어보았다.
이 유적지 언덕에 올라보면 사방이 환하게 트여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기록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힌트없는 엄청난 수수께끼를 마구잡이로 던져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록이 정확하다면 유물이나 유적을 보며 추측하는 것이라도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억측만 난무하게 된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난 뒤 의성군에서 깔끔하게 손을 보아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유적지의 면적도 제법 커서 돌아보는데도 만만치않은 시간이 들어간다.
나는 잠시 그늘에 들어가서 주위를 살폈다.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말고는 소음이 발생할 일이 없으니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멀리 보이는 산이 금성산이다. 이 부근의 명산이라 할만하다. 산정상 부근에는 조문국이 번성하던 당시에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전한다. 젊었던 날에 한번 올라가본 기억이 있지만 그땐 이런 사실을 몰랐으니 유심히 살펴두지 않았다. 신라군의 침입을 보고 대피했던 조문국의 아녀자들과 군대가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전해온다.
역사서에 달랑 한두줄로 언급된 것이 전부인 조문국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유물은 어디쯤에나 묻혀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남아있는 즐비한 고분들이 온전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도굴당한 것인지 나는 짐작할 길조차 없었다.
경주로 내려가는 기차시간이 다되어 가기에 나는 탑리역으로 가기 위해 돌아서야만 했다.
궁금하기만 한 조문국의 비밀은 그저 가슴에 묻고 사는 수밖에 없다. 내가 전문 역사학자가 되어 비밀을 풀어내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만 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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