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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쁘고 자존심 강한 것도 문제다 - 목화 그리고 미녀

by 깜쌤 2011. 6. 25.

 

돌비석에는 분명히 소문국(召文國)이라고 쓰여져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문국이라고 읽는다. 관계자료들을 보아도 소문국이라고 되어 있는 곳보다는 조문국이라고 읽은 곳이 훨씬 더 많다. 지금 가수 조문국씨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게 아니므로 혹시 가수 이야기를 연상하고 들어온 분가운데 역사나 여행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조금 참으면서 읽어두시라. 손해볼 일은 없지 싶다.

 

중원에서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초원을 만날 수 있다. 중국지도를 놓고 보면 황하(黃河) 흐름이 ㄷ자모양으로 굽어 흐르는 곳을 볼 수 있다. 그 ㄷ자로 흐르는 안쪽이 오르도스 지방인데 그곳은 전한시대때만해도 흉노들의 근거지였다.

 

 

 

위 지도를 보자. 지도 중앙 CHINA라고 써둔 곳 위에 붉은 점이 보이는가? 그 도시가 바오터우,즉 포두(頭)라는 곳인데 그 오른쪽에 후어하오터( 呼和浩特 Hohhot 호화호특)라는 도시가 있다. 포두와 호화호특을 잇는 선 위로 거대한 산맥이 솟아있는데 그게 음산산맥(陰山山脈)이다. 음산산맥의 줄기 가운데 하나가 대청산(大靑山)이다. 호화호특에서 출발하여 버스를 타고 북으로 올라가 대청산을 넘으면 광활하기 그지없는 어마어마한 초원지대를 만나게 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초원지대를 보고 싶다면 일단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北京 북경)으로 가자. 북경에서 호화호특까지 기차를 타고 간뒤 버스로 대청산을 넘으면 된다. 북경에서 호화호특까지는 기차로 10시간 정도만 가면 된다. 그럴 경우 만리장성을 기차안에서 스쳐지나가며 구경하는 것은 보너스로 얻게 된다.   

 

 

호화호특에는 왕소군(王昭君)의 동상이 서 있다. 왕소군! 흔히 그녀는 중국의 4대미녀 가운데 한사람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말 지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대의 서시와 한나라 시대의 왕소군,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과 당나라때의 양귀비를 중국 4대미인으로 꼽기도 하나 무슨 근거로 그렇게 정하였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왕소군의 이름자 속에 들어있는 '소'라는 글자는 부를 소(召 부를 소)자 앞에 날 일(日)자가 들어있는 밝을 소(昭)자로 되어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나가보자. 왕소군 그녀는 기원전 33년에 한나라 황제였던 원제의 명령으로 음산산맥 너머 흉노의 땅으로 가서 호한야선우()에게 시집을 간다. 그녀는 흉노의 왕인 선우(單于 단우가 아니다)의 부인, 즉 연지()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 왕소군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난게 아니었다.

 

 

남편인 호한야선우가 죽고나자 이번에는 호한야선우, 그러니까 남편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선우()에게 시집을 가서 두 딸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서경잡기(西)라는 책에 의하면 왕소군이 흉노의 왕에게 시집을 가게되는 기막힌 사연이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흉노의 세력이 한창 막강해져 있을때 흉노는 한나라 황제에게 한(漢)나라의 공주와 혼인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온다. 문명사회의 중심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중국에서 오랑캐라고 얕잡아 부르던 흉노의 요구대로 진짜 공주를 시집보낼 수 없는 노릇이어서 후궁가운데 한사람을 골라 보내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후궁들은 오랑캐들이 득시글거린다는 낯설고 먼 곳으로 뽑혀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에게 뇌물을 바쳐서 자기를 실제보다 더 예쁘게 그려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왕소군은 그런 부탁을 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결국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畵工) 모연수의 농간에 의해 추녀로 그려진 그녀가 흉노에게 보내질 가짜 공주로 선발되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어서 화공 모연수가 처벌받았다는 사연이다.

 

 

이야기가 조금 어긋나게 진행되고 말았다. 옷감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엉뚱하게 흉노까지 이야기가 번지고 말았으니...... 흉노는 말을 타는 민족답게 호복(胡服)이라는 바지로 된 옷을 입었으며 말을 타고 활동하기에 편리하도록 가죽장화 종류의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때 조나라 무령왕(BC340 - BC 295. 백제의 무령왕이 아니다)은 흉노들이 입는 복장의 편리성을 깨달아 호복을 입기로 결정하고 자기가 다스리는 조나라 백성들에게 권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알고 본다면 중국인들이 바지를 입게 된 연유는 꽤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고 역사도 제법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지를 입을 줄 몰랐던 공화정시대 고대 로마인들이 오늘날의 프랑스에 살았던 갈리아=골, 켈트족)인들이 입고 다니는 바지를 보고 놀라게 되는 것과 흡사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공화정 로마나 제정(帝政)로마 지배층 사람들은 양털로 짠 토가를 입었다. 토가를 입는다는 것은 오늘날의 양복에 해당하는 정장이라고 보면 된다. 결국 토가는 모직천으로 만든 커다란 반원형 천 한장으로 이리저리 몸에 감아 멋을 낸 옷이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사극에 보면 굉장히 호화로운 색채감이 나는 멋스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구 등장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화학적인 인공염색재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과연 그렇게 화려하게 염색을 하고 고급스런 옷을 입는 것이 가능했을까?

 

 

일부 지배계층에서는 고급 비단 옷을 입었을 것이다. 평민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우리나라에 목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 말기라고 전해진다.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간 것이 1363년의 일이었고 귀국할때 붓대롱 속에 목화씨 세알(다른 연구물에 의하면 열알)을 숨겨가지고 와서 목화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적으로 목화가 퍼지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목화가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문익점 선생이 목화를 가지고 들어온지 한 삼사십여년 뒤의 일이라고 하니까 결국 우리 조상들이 무명으로 된 옷을 입게 된 것은 이제 600여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목화로 실을 잣고 천을 짜서 옷을 만들어 입기 전에는 삼베옷이나 모시옷이 주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시는 작물 재배지가 한정되어 있었으니 삼베가 가장 흔한 옷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베옷을 입고 겨울을 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으랴?

 

  

얼핏 생각하면 가죽옷을 지어입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짐승가죽으로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옷감을 짜는 것보다 더한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다. 한번이라도 짐승 가죽을 벗겨본 사람은 알겠지만 가죽이라고 하는게 마르고 난 뒤에는 얼마나 뻣뻣해지고 꾸덕꾸덕해지는가 말이다.

 

누에를 길러서 실을 만든 뒤에 비단피륙을 짜서 옷을 만들어 입는다는 것은 하층민이 맡았겠지만 소비는 상층부 지배계급을 이루는 소수의 권력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엄청나게 비싼 비단이었기에 일반 백성이 아무렇게나 해입을 수 있는 재료는 아니었던 것이다. 로마시대에만 해도 비단은 같은 무게의 황금과 교환되지 않았던가? 

 

   

조문국 유적지 옆에는 문익점선생 면작기념비가 함께 서있다. 문익점 선생이 목화를 재배한 곳이 전국에 세군데 정도가 된다는데 그 중에 한군데가 조문국 유적이 있는 경북 의성군 금성면 일대라고 전해진다.

 

 

 

 

 

면화(목화)가 생산되면서 의복문화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옷차림만 변한 것이 아니라 덥고 깔고 자는 이불같은 침구류에도 큰 변화가 생긴 것은 당연하다. 면화가 중국에 들어온 것도 13세기 정도였다니까 당시로서는 새로 들어온 아주 귀한 작물의 종자를 문익점 선생이 구해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훌륭함은 바로 이같은 식견높은 혜안에 두어야하지 않을까? 

 

  

 

목화열매를 입에 넣고 씹어본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때 그런 경험을 제법 했었다. 처음에는 조금 달콤한 맛도 느끼지만 나중에는 입안이 퍽퍽해지면서 삼킬수가 없었다. 그러니 목화밭에 들어가 도톰하게 자란 열매를 따서 입에 넣는 즐거움은 잠시 잠깐으로 끝나고 만다.   

 

 

나는 면작기념비 표지판에서 괜히 왕소군을 떠올렸다. 그녀는 과연 어떤 옷을 입고 흉노의 선우에게 출가를 했을까 하는 쓰잘데기없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소문국을 조문국이라고 읽는 연유도 궁금했었지만 목화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조문국 유적지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새로 글을 써서 올릴 생각이다.  

 

 

현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의복 한가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이 감히 누려보지 못한 너무 큰 혜택을 입었다. 요즘처럼 멋진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이란 말인가?

 

 

남북전쟁의 근본 원인도 미국 남부의 목화농장에서 일하던 노예문제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목화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귀한 작물임을 알 수 있다. 

 

 

의성군 금성면도 알고보면 제법 볼거리가 푸짐한 편이다. 유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성산도 한번쯤은 올라가볼 만한 곳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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