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도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올해 장마는 좀 수상한 구석이 많아서 추적추적 내리는 그런 비가 아니고 언제 출몰할지도 모르는 게릴라처럼 예측이 불가능하도록 특정지역에 불쑥 나타나서 양동이로 마구 쏟아붓고는 재빨리 도주하는 요상한 형국을 보여 주었다.
젊었던날, 깊은 산사에 가서 두어달 머물러 있었던 사실이 있다. 고요한 절간방에 앉아서 종일 내내 지루하게 따루는 비를 보면서 온갖 생각을 다 했다. 그럴땐 학창시절에 배운 시조 한수가 생각나서 나직한 소리로 읊조리기도 했는데.....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은이가 일도없이 기다려져
열린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그랬다. 고요한 절간에 혼자 앉아있을땐 오겠다고 약속한 사실도 없는 이를 일도 없이 가다리기도 했다. 어설프게 읊조리곤 했던 "혼자 앉아서"라는 시조는 육당 최남선 선생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일독립운동당시 독립선언문을 쓰신 분이 어쩌다가 말년에 친일파로 변절을 해서 두고두고 욕을 얻어먹는 것을 보면 그지없이 마음이 아프다.
젊었던 날에 워낙 방황을 많이 하고 살았던터라 비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일도 제법 된다. 돌이켜보면 자랑스러운 일보다는 부끄러운 일이 더 많았다. 낮에는 교회 일로 중요한 분들과 회합을 가졌다. 저녁에는 인생길에서 만난 제법 소중한 분들을 대접할 일이 생겼길래 지난 토요일 오후에는 보문관광단지로 올라가야만 했다.
다른 분들이 오시기 전 사전(事前)에 일의 진척도를 미리 확인하고자 버스를 타고 올라갔던 것인데 날좋은 토요일 저녁에는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곳이지만 비가오는 저녁이어서 그런지 사람의 흔적조차 뜸해보였다.
보문호를 둘러싼 산책로에도 사람이 드물었다. 사실 말이지 나는 이런 호젓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와 이스탄불 사이에는 높은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다. 겹겹이 둘러쳐진 산자락에 볼루라는 소박한 작은 도시가 아담한 자태를 숨기고있었다.
볼루 교외 산중에는 아주 예쁜 호수가 터잡고있었다. 높은 산중에 자리잡은 호수이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호수가 아니다. 뾰족한 잎을 단 침엽수들이 하늘로 마구 치솟아오른 가운데 호수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둘러싼 숲속은 한낮에도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그런 호수에 비하면 우리나라 호수들은 정말 여성적이면서도 아주 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보문호수의 물이 만수(滿水)를 자랑하고 있었다. 무넘이에 모처럼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예전에 글래디스 태풍이 경주를 강타했을때는 보문호수와 덕동호수에 살고있는 거대한 초어들이 무넘이를 넘어 북천으로 마구 쏟아져갔다. 덕분에 경주시민들은 거대한 초어로 매운탕을 끓여먹는 횡재를 하기도 했고.
나는 손님들을 대접해야할 장소로 갔다. 사람사이의 만남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가만히 따지고보면 인생살이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의 연속이 아니던가? 어떤 사람을 어떤 자리에서 만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인생의 방향과 결과가 달라지기도 했다.
사방에 물기가 가득했다. 습기 때문에 온천지가 축축했지만 그리 기분나쁠 정도는 아니었다. 확실히 요즘은 홍수가 줄어든 것 같다. 텔레비전에는 홍수 피해를 입은 지역의 참혹한 영상이 나오고 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규모나 피해정도 면에서 줄어든 것이 확실하다.
온천지에 나무가 가득하고 제방이 잘만들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어떤 학자들의 글을 보니까 우리나라가 논농사 위주의 국가여서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우기의 상당한 강수량을 논이 저장해주기 때문에 피해가 줄어든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논에 저장되는 물의 양만 하더라도 엄청날 것이다. 호반에서 특급호텔로 통하는 길에도 사방에는 고요함뿐이었다.
초대했던 분들이 거의 다 오셔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매일매일 펼쳐지는 사람살이가 이렇게 부드럽고 순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남의 입에 들어가는것조차 빼앗아 먹어야 속이 시원한 사람들과 부대낀다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다.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보문에서 흘러내리는 북천의 물줄기는 아직도 탁류가 되어 마구 끓어 넘쳤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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