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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자녀교육, 초등교육/교육단상(敎育短想)

나도 역시 비겁자였다

by 깜쌤 2011. 6. 8.

살아오면서 참으로 많은 교육자인척 하는 사람들을 겪었습니다. 참다운 교육자들도 많았었지만 독선과 아집에 젖은 고집불통 경영자가 되어서는 '무조건 돌격앞으로'를 외치면서 무리한 시책을 밀어붙이는 사람도 많이 보았습니다. 항상 양지(陽地)에 서서 햇볕과 단맛에 길들여져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요?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난 뒤에 우리나라 사회는 모든 부분에서 공황기를 맞았던 모양입니다. 사회를 지탱해주던 고급인력이 하루 아침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일본강점기에 인기가 있었던 직업은 그야말로 뻔했습니다. 은행원이나 교사와 경찰, 그리고 면서기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공무원 정도가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경찰이나 그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독립운동하던 분들을 잡아넣던 자가 광복후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자처하면서 카멜레온을 능가하는 신분변신 과정을 거쳐 경찰간부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런 자의 아들이 앞장서서 '역사 바로세우기'운동을 한답시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어처구니 없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하기사 아들이 아버지의 이력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만 적어도 그런 일에만은 앞장서는 법이 아닐 것입니다.     

 

 

교육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일본인 교사와 교장, 교감이 빠져나가자 남아있던 한국인 교사들이 그 자리를 메워야했기 때문에 벼락출세하는 일도 생겼고 심지어는 학력미달자가 교직에 쏟아져 들어오는 일도 많았습니다. 제가 모신 분 가운데는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교장이 된 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한국인 교사로 복무하다가 이십대 중반이나 후반에 벼락출세한 교장이 되어 정년까지 버틴 사람들 가운데에는 교장경력만 삼사십년이 된다는 웃지못할 희극이 엄연히 존재했었습니다. 주위를 잘 살펴보면 지금 살아계신 분 가운데 그런 사람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물다섯살의 나이에 교장이 되었을경우 예순다섯까지 근무하면서 정년(현재는 예순둘로 줄어들었습니다)을 다 채웠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아는 분 가운데는 그런 경력을 가진 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상부기관의 눈치보기는 얼마나 잘하는지 놀랄 정도였는데 자기 부하 선생들에게는 강압적인 모습으로 돌변하여 직장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어떤 교장은 직원회의장소에서 평교사로 늙어가는 원로교사에게 폭언을 퍼붓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아무말도 못했던 내자신의 모습이 나이들고 보니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살아보니 그런 시시한 권력과 사건도 별 것 아닌줄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적어도 1970년대나 80년대까지는 교직사회의 분위기가 전혀 민주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같은 단체가 그냥 생긴것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나는 전교조 소속 교사도 아니며 교원 총연합회 소속도 아닙니다만....)

 

처세술이 뛰어나고 생존능력이 탁월한 분들가운데에는 그런 식으로 교장을 하다가 장학관으로 변신을 해서 지역교육청의 학무과장이나 교육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남을 욕하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진정으로 존경을 할만한 교육자가 드물었기에 그런 어두운 그림자가 더 깊은 자국이 되어 내 가슴에 스며든 모양입니다.

 

 

그런 분들과 교제도 적었기에 진솔한 참회의 이야기를 못들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제강점기때 교사를 했던 사실을 정말 부끄러워했던 분을 만난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교사를 했기 때문에 잘못했다는 식으로 매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인들이 지배하던 시절에도 한국인으로 선생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은근히 민족의식을 고취한 깨어있는 분들도 제법 많았다고 전해들었습니다.  

 

그때 살았으니 무조건 잘못했다는 논리로 친다면 1970년대의 유신체제하에서 선생을 하면서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것에 대해서도 응당 모두들 부끄러워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신부터 함부로 남을 욕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가 봅니다. 유신 치하때는 제가 젊었던 날들이었기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10월유신의 정당성을 언급한 교과서 내용을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훗날 너희들이 크면 알게 될 것이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그냥 넘어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대어놓고 거부운동을 못했으니 알고보면 나도 참 부끄러운 선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제가 이야기를 꺼낸 분들이나 나같은 용기없는 선생이나 결국은 모두 다 오십보백보로 마찬가지겠습니다.

      

 

 

오늘 신문을 통해 제가 평소에 존경해마지 않았던 김준엽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데모를 주동한 제자들을 처벌할 수 없다고 버틴 소신있는 학자이며 대학총장이라는 이야기는 김준엽총장 퇴진반대 운동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잘 몰랐었습니다. 

 

당시에는 언론 탄압이 극심하던 시절이었기에 신문의 행간을 보며 사건의 추이를 대강 짐작만 할 수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하지 않는 그런 소식을 정보에 어두운 시골 선생이 어찌 잘 알수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소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나같은 어리바리한 인생이야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에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질 일도 없으니 소신을 굽혀가며 살아도 아무 일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최근 한 십여년동안 제가 모시던 상사들로부터 내자신이 희망하기만하면 모범공무원으로 상신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제법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가볍게 거절했습니다. 내가 삼류선생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정말 훌륭한 선생님들이 곳곳에 많고 많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지만 이제 나같은 사람은 그런 명예조차 싫어졌기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귀한 명예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선생들이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신상필벌의 원칙만 잘 살아있어도 우리 사회는 한결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보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요?

 

 

세월이 가면 누구나 다 직장에서 은퇴를 해야하며 종말에는 모두들 다 죽어야하는게 인생입니다. 날 기억해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더더욱 명예를 탐할일도 없습니다. 사실 이젠 거의 다 내려놓고 욕심조차 버렸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되는 책들도 슬슬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남겨두면 제 아이들에게 짐만 될것 같기에 말입니다.  

 

 

큰나무가 되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진 잡목이 된 내인생을 생각하면 가슴속이 그저 허허롭기만 합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