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도 시설이 없던 옛날 사람들은 물이 좋은 곳에 모여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터가 좋아도 우물이 없다면 사람살만한 곳이 못된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유럽의 마을들 가운데는 언덕이나 산위에 자리잡은 경우가 제법 있는데 아무리 수비하기에 좋은 요새처라 할지라도 물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살고 싶어도 못사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의 유적지에 가보면 거의 예외없이 물을 공급하는 수도 시설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물이 있어야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다 적용되는 진리일 수밖에 없다.
내가 처음 경주라는 도시에 살러왔을때 오늘날의 대릉원 동쪽 옆에는 쪽샘골목이라는 유흥가가 있었다. 유흥가라고는 해도 주택지가 같이 섞여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동네였지만 지금은 바로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어지간한 집들이 거의 다 뜯겨져나가버려 사람구경하기조차 어려운 동네가 되고 말았다.
쪽샘골목이 시작되는 곳, 그러니까 현재의 황남빵집이 있는 큰 도로 맞은편에는 쪽샘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는데 그곳에 기념비가 자리잡고 있다. 그 비에는 다음가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인용하면 이렇다.
"현 경주시 황남동 일대는 옛날 임금이 살았던 마을이라하여 고려 때는 황촌(皇村)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곳에는 샘(泉)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맑고 맛이 좋을 뿐아니라 아무리 가물어도 그 수량이 줄지 않았다고 전한다. 사람들이 이 물을 쪽박으로 떠 마셨다고 하여 쪽샘이라 불렀다.
이 우물은 인근 황오동의 반구정샘, 소금강산의 백률사의 우물과 함께 경주 3대 우물로도 유명하며, 현재 이 쪽샘 마을에는 200여 가옥에 130여개의 우물이 보존되고 있어 우물 많은 동네로도 유명하다. "물 맛 좋은 고장 인심도 좋다!" 라는 말이 있듯이, 이 우물을 통해 경주의 훈훈한 인심을 알리고 지역의 상징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1997년에 경주시가 복원하였다."
대강 그런 내용인데 그 정도로 여기 물맛이 좋았고 우물수도 많았던 모양이다. 한때는 이동네도 제법 번창했다. 1980년대만 해도 여기는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유흥가이기도 했다. 퇴근 시간이 되어 술생각이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동료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후에 쪽샘의 어느어느 집에서 모이자는 식으로 약속을 할 정도였다.
여기는 20여년의 장기간 동안 철저하게 발굴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신라시대에는 쪽샘동네가 귀족들의 거주였을 것이라고 짐작을 한다니 발굴을 할 경우 많은 유물이 쏟아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하는 눈치다.
이 동네가 뜯겨나감으로서 경주시내 시가지 상권이 쇠퇴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경주시내에 주거지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주거지가 외곽으로 옮겨감으로해서 상가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부수적으로 한때는 아이들이 바글거리던 인근의 초등학교들조차 폐교의 위기로 몰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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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내의 계림초등학교나 월성, 황남같은 전통있는 학교들은 입학생 부족으로 인한 고통을 이미 겪고 있는 중이다. 사람이 없으니 상가가 죽고 아이들이 없으니 학교가 쇠퇴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다. 무너져가는 상가와 학교를 살리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얼마나 효과를 볼른지는 미지수다.
현재까지의 발굴성과는 그저 그런 모양이다. 신라시대 귀족들의 거주지였으니 관계당국의 입장에서는 제법 기대를 하는 눈치지만 그동안 훼손이 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발굴에 대한 폐해가 워낙 커서 그런지 살던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유물이 나오면 슬며시 먼저 어째버린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경주시민의 처지에서 보면 문화재와 발굴에 관계되는 법률들은 악법에 해당되었다.
아직까지도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떠날 형편조차 되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기가 발굴대상지가 되어 있으니 아무 희망도 없이 줄기차게 버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이젠 휑한 장면만 남았다. 대릉원 담장이 있는 도로쪽으로는 아직 떠나지 못한 쌈밥집들이 몇집 남아있기도 하다.
어느 집 마당의 감나무였을까? 자잘한 땡감 어린 것들이 소복이 매달려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걸어왔을때쯤 아직까지 어린티가 나는 청년이 내 뒤를 슬슬 따라왔다. 갑자기 내 곁으로 다가온 아이는 내 바짓가랭이를 잡더니만 양말을 확인하는 것이다. 녀석! 그 아이도 이 부근에 사는 모양이다. 호통을 쳤더니 슬그머니 도망을 갔다. 싱거운 녀석이지만 나는 그가 정상이 아니란 것을 안다.
빈터 한모퉁이에 난데없이 보리가 보였다. 경주에는 황남빵만 있는게 아니다. 경주찰보리빵도 최근들어 아주 유명해졌지만 유감스럽게도 처음 만들어낸 분이 특허 등록을 못했던 모양이다. 요즘은 수많은 사람들이 덤벼들어 찰보리빵을 만들어 판다. 경주 시가지를 다녀보면 그런 빵집이 상당히 많이 있음을 알 것이다. 찰보리빵, 그걸 위해 재배하는 것일까?
왠지 마음이 황량해져오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일수록 서로서로 야박해지고 각박해지기 시작함을 알기 때문이리라. 1960년대만 해도 내가 자란 작은 시골마을에는 많은 싸움이 있었다. 무슨 아귀다툼이 그리 자주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동네도 그랬으리라.
쪽샘동네 골목을 지나다보면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는 모습을 한번씩은 볼 수 있었다. 술취한 취객과 술집 주인사이에도 자주 싸움이 있었고 손님들끼리도 싸움이 붙었다.
그게 인생이리라. 앞으로 이 동네는 고분 공원으로 조성될 모양이다. 이왕하는 발굴이고 개발이라면 조금 더 속도를 내었으면 좋겠지만 발굴이라는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세월아 네월아 하고 시간만 보내는 사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발굴이라는 명목으로 이 사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일부 관계자들의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보물창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때도 많다. 문화재의 소중함을 모르는바는 아니지만 경주에 오래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 주위에는 그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제법 되기 때문에 나부터도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법이 지향하는 바가 아무리 좋아도 민폐를 끼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악법이 되고 만는 것이다. 법(法)이라는 글자는 삼 수 변에 갈 거(去)로 이루어져 있다. 물이 흘러가듯이 부드럽게 순리대로 하는게 법이라는 말이 아닐까?
슬금슬금 걷다보니 어느덧 첨성대가 있는 동부사적지구대쪽으로 이어지는 골목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다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 첨성대와 계림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쪽샘지구가 하루빨리 아름답게 단장되어 경주를 찾는 모든 사람들과 시민들이 애용하는 명소가 되기를 빌어보았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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