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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초등교육/교육단상(敎育短想)

잊혀진 군인들은 너무 슬픈 존재들이다

by 깜쌤 2011. 5. 5.

 

기원전 55년 봄, 오늘날의 이탈리아 중부 루카에서는 당시 로마를 틀어쥐고 있던 세사람의 실력자가 모여들어 회담을 했다. 모여든 세사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니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이 세사람이었다. 당시의 실력자 세사람은 공화정체제의 로마 영토를 적당하게 분할해서 통치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고 그 합의에 의해 크라수스는 오늘날의 중동지방을 총괄하는  5년 임기의 시리아 총독을 맡기 위해 임지로 떠났다.

 

 

          1 : 파르티아                    2 : 공화정 로마                분홍색 지점 : 크라수스 군대의 패배지

          3 : 중국 감숙성 영창현

 

갈리아 원정을 통해 인기를 얻어가던 카이사르는 자기 휘하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던 30대 중반의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게 기병 1천명을 주며 아버지 마르쿠스 크라수스를 따라가도록 배려했다. 아버지를 따라가서 공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크라수스는 당시 로마 최고의 부자였다. 요즘 말로 치자면 세계최고의 부자나 다름없는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정치에도 손을 대어 공화정 로마를 다스리는 세명의 거두(巨頭) 가운데 한명이었다. 시쳇말로 한다면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명성과 명예를 자기도 나누어 가지고 싶어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재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정 길에 나섰다. 크라수스는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동방의 강대국 파르티아를 정복하기 위해 장도에 올랐다.

 

 

기원전 54년 크라수스가 지휘하는 8개군단 3만8천여명은 오늘날의 이라크 영내로 진격한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엄청 길어지므로 핵심만 정리해보자.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크라수스는 수레나스라는 인물이 거느리는 파르티아 군대의 유인작전에 걸려들어 대참패를 당하게 된다. 상대가 워낙 노련했기도 했지만 속임수에도 제법 도가 튼 인물이었기에 아버지 크라수스 정도로는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들 크라수스였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많은 글들 가운데는 아들 크라수스가 안죽고 살아난 것처럼 이야기를 하지만 파르티아 군대의 포위망을 뚫지못했던 그는 결국 자결하였고 카이사르가 나누어 주었던 갈리아인 기병대원들도 전원 전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현장에서 살육을 면한 부하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기원전 53년 6월 12일, 수레나스의 마지막 속임수에 걸려든 아버지 크라수스는 로마군 보병들의 핵심무기였던 길이 56센티미터짜리 양날검 글라디우스에 찔려서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령관이 파르티아의 포로로 잡히는 것을 두려워한 부하가 찌른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약 4만명에 이르렀던 크라수스의 군대가운데 살아돌아온 사람이 약 1만여명, 포로로 잡힌 군인이 약 1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대참패를 당한 것이다. 이들 포로들은 파르티아 왕국의 북동쪽 도시인 메르프로 보내져 파르티아를위한 병역에 종사해야 했었다.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공화국의 동쪽지방 도시인 (Mary)가 바로 르프로 알려져 있다. 

 

 

 

빨간색 점이 찍힌 지점 : 크라수스 부자의 패배지          초록색 점 : 메르프. 오늘날의 마리

1 : 오늘날의 이라크                                  2 : 오늘날의 이란

3 :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4 : 중국 감숙성 영창현 리첸 마을

 

세월이 흘렀다. 서기 2005년경부터 이상한 소문이 중국 서부 섬서성에서부터 솔솔 풍겨나오기 시작했다. 소문인즉 감숙성 여창현 리첸(驪靬 려간)이라는 사막속의 작은 동네에 로마군대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지구촌 곳곳으로 번져나갔고 다양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려간이라는 말은 한자를 우리말 발음으로 읽은 표현이다. 두음법칙을 적용해서 읽으면 여간이 돌 것이다. '려(驪)'는 가라말을 의미하고 간은 가죽을 의미하는 한자이다. 가라말이라는 것은 털빛이 온통 검은말을 뜻한다.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6년경 진탕(陳湯 천탕)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생김새가 아주 다른 천여명의 군인들을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후한서에 정말 그런 부분이 있는지는 잘모르겠지만 중국측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이므로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노란색 원 - 알타이 지방              붉은 점 : 감숙성 영창현 려간마을(깐수성 융창현 리첸마을)

노란 점 : 예로부터 장안으로 알려졌던 서안(西安)   

      

어떤 학자들은 리첸마을에 살고있는 특이한 용모(서양인을 닮았으니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특이하게 보였으리라)를 지닌 사람들이 크라수스가 인솔했던 부대원의 후손들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서 유전자 조사결과까지 내놓으면서 로마군단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는 식으로 단정을 짓기도 했다. 진실은 하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다시 로마 역사로 돌아가보자. 기원전 44년 3월 15일 오전 10시를 전후한 시각에 유럽과 중동일부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를 뒤흔든 암살사건이 터지고 만다. 원로원이 지배하는 공화정(共和政)중심의 로마를 파괴하고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帝政)을 추구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공화파 원로원 의원들에 의하여 암살된 것이다.

 

이날의 사건을 라틴어로 Idus Martiae라고 한다. 영어로는 너무나 유명한 The ides of March이고 현대 이탈리아말로 표현하자면 Idi di marzo라고 부른단다. 영어와 라틴어, 이탈리어까지 함께 소개하는 것은 표현 문자의 유사성 때문이다. 하여튼 BC 44년 3월 15일은 카이사르가 암살된 날인데 그날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파르티아 원정을 발표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로마는 전쟁터에서 적국에 붙들려간 자기나라 병사를 데려오거나 시신을 찾아오는 일을 절대 게을리한 나라가 아니었기에 크라수스의 복수를 위해서도, 포로로 붙들려간 일만명 가량의 로마병사들의 귀환을 위해서도, 땅에 떨어진 로마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도 파르티아 원정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으리라.

 

 

그런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던 카이사르가 암살당해버림으로서 역사의 흐름은 다른 방향으로 급물살을 타고 말았다. 파르티아 제국의 메르프로 끌려간 병사들의 운명과 상황은 다시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 로마제국에 의해서 파악되어 포로 송환을 요구하지만 이미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존재조차 파악을 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포로로 붙들려갔든 전사를 했든 간에 병사들의 모국이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챙겨주며 기억해준다는 사실말이다. 최후에 남은 단 한명의 병사라도 다시 데려오려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국가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면에서 너무 무심했던 것이 아닐까? 천만다행으로 뒤늦게나마 눈을 떠 한 십여년전부터 전사자 유해발굴작업에 나서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잊혀진 병사들은 슬프다. 기억되는 병사들은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고귀한 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함부로 훼손되다면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서해에서 우리의 해군병사들이 전사를 하는 순간에도 동쪽으로는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으로 구경을 갔던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말이 없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