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서원은 최진립장군을 모신 서원이다. 보통 서원이라고하면 뛰어난 문인계통의 선비를 향사한 곳이 많지만 여긴 아주 드물게 무인을 기리는 곳이다. 조선 중후기 숙종임금이 직접 숭렬사우(崇烈祠宇)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그런 영광을 입은 분은 임진왜란 당시에 대활약을 보인 이순신과 진주목사 김시민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에게 그다지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최진립장군은 임진왜란 당시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상도 여러 곳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분은 1568년에 태어나서 1636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1636년이라면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다. 사실 그 어른은 병자호란때 순국하셨다.
병자호란이 터졌을때 그분의 연세는 이미 예순아홉이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평균수명을 고려한다면 굉장히 높은 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진격을 하다가 경기도 용인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원을 나와 마을로 내려가다보면 최진립장군 신도비가 서있다.
거북 조각이 비를 등에 지고 있는 형상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보면 예사로 볼 수 있는 서원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나중에 나라에서는 최진립을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해서 문중에서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다고 전해진다. 최진립장군이 전사를 할때 몸종이었던 '기별'이라는 분도 죽음을 함께 했기에 최씨 가문에서는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준다고 한다.
용산서원은 대원군이 서원정리를 할때 정리대상에 올라 사라졌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나중에 새로 복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건물이 깨끗하게 보인다.
물론 관리를 잘해서 그렇기도 하리라.
나는 아까 왼쪽에 보이는 쪽문을 통해서 이 서원으로 들어온 것이다.
마루 밑에는 장작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문짝하나에도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듯 하다.
나는 툇마루에도 걸터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쩐지 엄숙한 기운이 가득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까 내가 거쳐지나온 수리뫼 음식점 건물이 보인다.
한지를 곱게 바른 여닫이 문이 제법 깔끔했다.
서원뒤에 있는 건물은 당연히 사당일 것이다.
신성한 공간으로 여기는 곳이니만큼 당연히 문이 닫혀있었다.
나는 까치발을 해서 담너머로 안을 살펴보았다.
'숭렬사우'라는 현판이 달린 건물이 보였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 건물이 한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계단에는 덜녹은 눈이 조금 남아있었다.
이젠 내려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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