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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0 중국-신강성:실크로드(完)

고창고성 1

by 깜쌤 2010. 11. 26.

 

길가에 거대한 흙벽이 보였다. 다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글 위성지도를 가공한 것이다. 1번이 아스타나 고묘지다. 2번으로 표시된 곳이 고창고성(高昌古城)이다. 고창(高昌)이란 이름 그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삶의 수준은 높고 번영이 이루어져 아주 창성한 곳이라는 말이리라. 이제는 폐허로 변한 진흙덩어리 뿐이지만......

 

 

흙으로 만든 거대한 성벽이 인상적이다. 어떤 곳은 성벽 두께가 10미터가 넘는 곳도 있다니 전성기에는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을 것이다.

 

 

성벽에 기대어 집을 지은 곳도 있었다. 아마 새로 지은 집이리라.

 

 

성벽의 높이가  11미터에 이르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우습게 볼 유적지가 아니다.

 

 

 우리가 탄 승용차는 입구에 도착했다. 날이 워낙 뜨거워서 그런지 동행한 두분은 질려버린 상태가 되어 고성터에는 안들어가겠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내가 대표로 혼자 들어가기로 했다.

 

 안그래도 비싼 입장료인데 대표로 들어가는 처지라고 표까지 끊어주니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짠돌이의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여기까지 와서 안들어간다면 말이되는가 말이다.

 

 커다란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위로 얼기설기 엮은 나무를 올린 뒤 엉성한 지붕을 만들었다. 지붕이 있으니 그늘이 만들어진다. 그늘 밑에 승용차를 세워둘 공간을 확보함과 동시에 작은 가게들이 몇개 자리를 잡도록 했다.

 

 

대문이 있는쪽이 입구다.

 

 

위구르인들의 전통복장을 걸어두었다. 색상이 얼마나 화려한지 모른다. 당연히 판매용이다.

 

 

 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7년전에 하나 구했다. 나중에 게스트 하우스라도 하나 운영하게 되면 소품으로 쓸까 싶어서 구한 것이지만 꿈은 꿈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화모도 색깔이 참 예쁘다.

 

 

여자 아이들 옷색은 또 어떻고? 빨강을 중심으로 하는 원색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옷도 드물리라.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광활한 진흙터를 배경으로 서있는 당나귀 수레다. 고성 안을 돌아다니는 택시인 셈이다.

 

 

 당나귀 주인들이 서로 먼저 다가와 타라고 권해오지만 나는처음부터 걷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다. 성안의 유적지들이 서로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날까지 뜨거우므로 당나귀를 타고 돌아다니는게 확실히 효과적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는 걷기로 한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비싸게 운임료를 부르는  태도가 싫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나오면 나도 얼마든지 사용한다.  

 

 

당나귀 택시의 주인들도 경쟁이 치열하다. 서로 태우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당나귀 목에 달린 방울에서 나는 소리가 제법 경쾌했다. 나는 길을 따라 걸었다. 이런 식으로 마구잡이로 걸으면 중요한 유적지를 못보고 그냥 지나쳐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좋다.

 

 

걸으면서 분위기를 느끼면 되기 때문이다. 워낙 넓고 폐허로 변한 곳이 대부분이므로 안내자가 없으면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는 처지다. 나는 이곳저곳을 걸어보기로 했다. 가만히 한 장소에 서 있으면 몸이 익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정도로 뜨겁다. 

 

 

발치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인해 종아리가 익어가는 듯 했다. 정말 뜨겁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늘에만 들어가면 너무 시원하다는 것이다.

 

 

이런 거대한 성을 만들어두고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천산의 눈녹은 물이 사막을 적셔주었기 때문이다. 이 부근은 오아시스라고 보면 된다.

 

 

여기에 살면 사람이 사막 한가운데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천산(天山)쪽으로 접근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산의 분위기는 나중에 자세하게 소개해 드린다.

 

 

흙벽이 만들어주는 그늘에 서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저 멀리 거대한 유적지의 흙벽이 보였다.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가까운 곳을 살펴보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돌아다녔으니 이번에도 삼장법사가 불법을 설파했다는 장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중요한 유적지마다 약간의 표식을 해두었다는 것이다. 나무로 바닥길을 깔아둔 곳도 제법 된다.

 

 

일년내내 빗방울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이 황폐한 땅에도 식물이 자라고 동물이 살고 있었다.

 

 

개미귀신이 사는 모래구멍은 거의 동굴수준이었다.

 

 

이런 구덩이에 빠지게 되면 개미가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여기에 삶의 뿌리를 내렸던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삼장법사 현장이 귀국길에 다시 이곳을 찾아왔을때는 이미 국씨고창국이 망하고 난 뒤였다. 그의 설법을 들어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침략국은 현장의 고국이었던 당나라였다.  

 

 

 삼장법사가 중국에 돌아온 것이 서기 645년의 일이니 귀국길에 들른 것도 그 부근 어느해쯤 되었으리라.

 

 

 그가 오늘날의 인도를 향해 출발한 것이 서기 629년의 일이다. 가는 길에 여기에 들러 약 한달간을 머무르면서 강의를 했다고 한다. 고창국의 지도자이며 불교신자였던 국문태는 그의 설법에 깊은 감동을 받고 인도로 가는 노잣돈을 대어줌과 동시에 길안내인까지 붙여주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귀국길에 삼장이 다시 여기에 들렀을때는 이미 폐허만 남아있었다니 삼장도 꽤나 허무해 했을 것이다.

 

 

불교의 흔적은 이제 거의 다 사라지고 이슬람 사원의 미나렛 두개가 화염산을 배경으로 솟아올라있었다.

 

 

훗날 여기에 터를 잡고 살게 되는 위구르인들은 불교를 버리고 회교로 개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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