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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0 중국-신강성:실크로드(完)

호탄에서 2 - 옥

by 깜쌤 2010. 11. 2.

  

 '호탄'은 중국식 발음이다. 어떤 분들은 '허텐'이나 "허탄'이라는 식으로 읽기도 했다. 한자로는 和田(화전)이라고 쓴다. 화할 화(和)에다가 밭 전(田)자를 쓴다. 앞에서 이미 소개한대로 우리식 발음으로 한다면 화전이 될 것이다.

 

 옛문서를 보면 '전'이라는 글씨가 밭 전자로 되어 있지 않고 문 문(門)속에 참 진(眞)을 넣은 전(闐)자를 썼다. 무엇인가 '가득차다' 혹은 '성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글자라고 한다. 화전은 역사가 깊은 도시이다.

 

   

바로 위의 사진은 호텔 속에 비치해둔 안내책자를 찍은 것이다. 중국 어디에서나 화전이라고 하면 단번에 옥의 산지라는 생각을 떠올릴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유비, 장비, 관우, 제갈공명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삼국지연의'라는 긴 이름대신 그냥 단순히 삼국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삼국지로만 부르면 역사책 이름이 된다.

 

 

            <금루옥의를 입은 중산정왕의 모습 - 사진 출처 : 중국 야후>

  

 그건 그렇다치고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는 스스로 주장하기를 중산정왕(中山正王) 의 후손이라고 했다고 알려져 있다. 유승은 기원전 154년경에 중산국의 왕으로 봉해진 사람이니까 지금부터 약 2200여년전의 사람이다. 

 

 그런 유승의 무덤이 1968년에 발견되어 발굴을 했는데 그때 그가 걸친 옷이 역사에 길이 남는 유물이 되고 말았다. 유승의 몸에 걸친 옷이 바로 금루옥의(金縷玉衣)였던 것이다. 유승과 그의 부인 두관은 옥에 황금실을 꿰어 만든 옷(=금루옥의 金縷玉衣)을 입은채 묻혀있었기에 한(漢)나라 시대의 높은 문화 수준에 전세계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해서 유승 부부는 옥조각으로 만든 옷을 입은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입고 있었던 옷은 평상시의 생활복이 아니고 죽은 자가 입는 수의(壽衣)였다. 옥으로 만든 수의를 입고 매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한나라 때부터 벌써 옥은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 문제는 옥이라는 물질이 아무데서나 마구 생산되는 물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옥으로 된 수의를 입은 유물의 모습- 사진 출처 : 중국 야후> 

 

 신라의 금관에도 많은 옥이 사용되었다. 국보 제 188호는 경주 대릉원의 천마총 안에서 발견된 금관이다. 그 금관에만도 자그마치 58개의 곱은 옥이 달려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금관에 달려있는 곱은 옥의 원산지는 어디였을까? 신라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옥을 채취해서 가공했다는 기록이 없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어디에서 수입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진수가 쓴 역사책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부여왕의 장례식때 옥의(玉衣)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문제는 부여쪽에서 현토군을 통해 한나라 조정에 부탁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럴 정도로 옥은 고대부터 유명한 존재였으며 귀중한 대접을 받았다.  

  

 

 화전 부근에서 생산되는 옥이 바로 연옥(軟玉)인데 이런 연옥으로 만든 물품들이 중국 도처와 아시아 여러나라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대부터 화전은 옥의 생산지로 널리 알려졌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옥 교역을 위한 특별한 무역로와 장사꾼들이 등장했다는 의미도 되고......

 

 우리는 화전 장거리 버스터미널 부근을 천천히 돌아다 보았다. 시장부근 길거리는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지만 활기에 차있었다.

 

 

 고대로부터 유명했던 옥은 옥이고, 옥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먹고 살기위해 시장바닥에 나와 앉았다. 누구는 옥수수를 구워팔기도 했고 누구는 수박을, 또 어떤이는 조롱박을 팔기도 했다. 

 

 

 여기에서는 한족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거의가 위구르인들뿐이다. 위구르인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동양적인 면모도 같이 가지고 있는듯이 보인다. 하지만 착각을 하는 것은 곤란하다. 원래 여기에 살았던 선주민들은 어쩌면 인도아리안계의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막강한 세력을 자랑했던 흉노들이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것은 역사의 수수께끼에 속한다. 사라졌던 흉노의 일부 후손들이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 밀려들어 선주민과의 혼혈이 이루어지면서 불교에서 회교로 개종하고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위구르인들의 조상이 되었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두자.  

 

 

 거리에는 위구르 문자와 한자가 섞여서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는 신기료 장사치들이 가득 몰려있는 곳을 지나갔다.

 

 

 같은 업종의 사람들은 한곳에 몰려있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장사치들은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서 신발을 손봐주고 있었다.

 

 

 우리는 큰 길로 가보기로 했다.

 

 

 손수레 위에 별별 물건을 다 얹어두고 파는 사람도 보였다. 조롱박 공예품이 내 눈길을 끌었다.

 

 

 작은 것으로 골라 하나 사려다가 참았다. 쉬 부서질 것 같아서 말이다.

 

 

 박공예 솜씨 하나는 장난이 아니었다.

 

 

 큰길을 따라 나와보았더니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변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런 경치나 보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상가 건물들은 한족들이 다 차지하고 있는듯이 보였다.

 

 

 우리는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지도도 없고 정보도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무작정 돌아다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시장 건물안으로 들어가보기로 했다.

 

 

 아틀라스 무늬로 된 옷을 입은 여자들이 많이 보였다.

 

 

 앳되게 보이는 소녀는 중학생쯤 되었으리라.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시장건물 속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더럽기 그지 없었다. 공기는 매캐하고 조명은 어두침침해서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면서 음식점을 찾았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결국 우리들은 약간 지저분하게 보이는 한족 식당을 찾아갔다. 요리 4가지에다가 밥을 시켰더니 51원이 되었다.

 

 

 1인당 13원 정도로 정도로 푸짐하게 먹을수 있었다. 우리돈으로 2500원 정도면 요리 4가지에다가 밥을 얹어 실컷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메모지를 꺼내 가격을 정확하게 메모해둔 뒤 주문을 해야만 장난을 치지 못한다.

 

 

 정말 오랫만에 먹어보는 중국요리다.

 

 

 위구르인들의 도시에 와서 한족요리를 먹다니..... 우리도 참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하고 돌아다니는 모자라는 여행객인 셈이다. 이래저래 이번 여행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호텔방에서 하미과 하나를 깎아먹은 뒤 저녁 외출은 포기하고 곧장 그대로 쉬기로 했다. 그렇게 화전의 밤은 덧없이 허무하게 깊어만 갔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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