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엔 작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만송정 솔밭에 심겨진 키작은 소나무들은 누가봐도 의도적으로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송정(萬松亭) 솔숲에만 들어가도 상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소나무 숲에 특히 많다는 피톤치트 향때문이리라.
2006년 11월에 천연기념물 제473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숲 가운데 벤치를 놓아서 정취가 넘쳐나게 했다.
두산 백과사전 엔사이버에 들어가서 검색해보니 이 숲의 내력은 굉장했다.
"조선 선조 임금 시절 서애(서
')" onmouseout=Chartip_off()>西애
')" onmouseout=Chartip_off()>厓) 유성룡 선생의 형인 겸암(겸
')" onmouseout=Chartip_off()>謙암
')" onmouseout=Chartip_off()>菴) 유운용 선생이(1539~1601)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부
')" onmouseout=Chartip_off()>芙용
')" onmouseout=Chartip_off()>蓉대
')" onmouseout=Chartip_off()>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만
')" onmouseout=Chartip_off()>萬송
')" onmouseout=Chartip_off()>松정
')" onmouseout=Chartip_off()>亭)이라 한다." 11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숲은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벌써 백년이 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을에서는 이 숲을 보존하기 위해 어린 소나무들을 계속해서 심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로마 사람들은 잘난 조상들 덕분에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것을 보면 위대한 조상 한사람의 역할은 정말 크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내가 그런 위대한 조상이 되지 못한다는데 있다.
나는 다시 둑길로 올라섰다.
둑 안쪽 공터에서는 그네를 타는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성춘향과 이몽룡은 아니더라도 방자와 향단이는 되어야 할터인데 이제 나는 방자가 되기도 글렀다. 아내가 향단이 되기조차 어려운 것처럼.....
다들 안전하게 잘 즐겼으면 좋겠다.
나는 아이들의 그네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강건편 전통가옥은 숲속에 조는듯이 숨어 있었다. 저 건물이 겸암정사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햇살이 가득 내리는 둑길을 천천히 걸어나갔다.
둑방가에는 초가마당에는 옹기들이 가득 정렬되어 있었다. 된장이나 고추장을 만들어 파는 집인가 보다.
짚으로 이엉을 엮어 담 위를 둘렀다.
담위를 덮은 이엉을 뚫고 자라는 맨드라미가 시골마을의 가을 정취를 살려주었다.
밭에 자라는 이 식물은 무엇일까? 혹시 율무밭이 이런 모습을 보일까?
둑길에는 말라죽은듯한 나무둥치가 두개 보였다. 벼락을 맞아죽었는지 아이들 불장난 때문에 죽었는지 살만큼 다 살고 늙어죽었는지 모르겠다.
두루뭉수리한 산봉우리들과 초가의 둥근 지붕이 어찌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으랴?
예전에는 흔하기만 했던 경치가 이젠 어찌 하회같은 곳까지 찾아와야만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바뀌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제 마을로 들어서보기로 했다. 마을을 감돌아 나가는 물길따라 쌓은 제방길을 더 걸어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졌기에.....
마을을 굽어보는 듯이 서있는 이 나뭇등걸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강변에 이런 등걸이 남아있는 것일까?
그냥 지나치려다가 속에서 보는 마을 경치도 제법 괜찮을 것 같아서 어린아이처럼 들어가보기로 했다.
예상대로였다.
이제 마을로 들어선다. 대궐같은 기와집을 보는 것보다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초가들과 서민들의 삶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돌아들어간 것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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