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타쉬쿠르간은 현장이나 고선지라는 인물때문에 더욱 더 가보고 싶은 장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장은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여기를 거쳐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장이 여기를 거쳐갔다면 그는 우리가 승용차를 타고 들어온 그 길을 따라 걸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선지도 마찬가지다.
지금 표면에 나와있는 유적들은 그 바탕이 명나라 시대의 지층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 아래를 발굴해보면 더 오래전의 유물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우리들은 성문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보았다.
보통 성이라고 하면 돌로 쌓은 석성(石城)을 떠올리겠지만 타쉬쿠르간의 성은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것이라고 여기면 된다. 한나라 시대에는 무엇으로 쌓았을까? 확실한 것은 중세시대 유럽스타일은 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늪지가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안에서는 어지간히 땅을 파면 물이 스며나오는 그런 우물들이 많았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여기는 성으로 올라오는 길목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예전의 성터는 상당히 넓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동양의 성은 서양의 성과 달리 거주지를 안고 성벽을 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 이 땅은 중국과 인도를 잇는 길목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파키스탄은 2차 대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도에 속했었다. 종교문제로 분리하여 독립을 해서 그렇지 파키스탄은 확실히 인도권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거쳐온 파미르 고원은 서역으로 통하는 길목이니 이 험한 산골짜기가 알고보면 대단한 전략적인 가치를 지닌 요충지였던 것이다.
어느 정도 성을 내려오자 성터 전체가 커다란 진흙덩어리 정도로 생각되었다.
이 얕으막한 성벽은 언제 만든 것일까?
상태로 보아 옛날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성안에서 밖으로 나가려는 중이다.
나는 다시 한번 더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제 우리들은 성밖으로 나왔다. 고선지는 서기 751년, 중앙아시아의 탈라스 강변에서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군대와 역사적인 전투를 벌인다. 3만 가량으로 추산되는 그의 군대는 2만명의 병력을 잃어버리는 커다란 패배를 당했다. 전투 결과 포로로 붙들려간 당나라 군사에 의해 이슬람세계로 종이를 만드는 제지 기술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양에 파피루스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삼이나 등나무 뽕나무를 이용해서 만드는 종이가 있었고 서방에 양피지(羊皮紙)가 있었다면 동방에는 죽간(竹簡)이 있었던 셈인데 종이다운 종이는 채륜이 발명했다는 종이가 서방의 파피루스보다 우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고선지가 지휘했던 탈라스 전투는 종이만드는 기술이 서방세계로 전달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성에서 습지로 내려오는 골목에도 물기가 제법 촉촉했다.
습지 한모퉁이에 세운 집이다. 흙을 가지고 터를 돋우어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을 평평하게 만든 것을 보면 강수량이 그리 많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양탄자처럼 폭신한 느낌을 주는 풀밭에는 코뚜레를 꿰지 않은 송아지 한마리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습지가로는 도로가 나있고 그 뒤로는 석두성이 보였다.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습지가운데로 가봐야 하는데......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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