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성에 오르기 바로전에 살펴본 골목길에는 흙담과 흙집들이 즐비했다. 이런 모습이 원래의 타쉬쿠르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제 올라간다. 문표를 파는 곳이 없어서 공짜로 입장이 가능한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올라가서 왼쪽을 보면 관리인이 머무는 작은 건물이 보일 것이다.
바로 이 건물이다. 검은 색 치마와 빨간색 윗옷으로 멋을 낸 아줌마가 입장료를 바도 있었다. 실제 입장료는 8원이었다.
성에 올라가서 아래를 보면 첫번째 사진에서 본 골목 부근은 납닥한 흙집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성 지도로 보아도 이 부근은 흙색으로 나타난다. 도로가에 심은 가로수는 의도적으로 심어서 키워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 안에는 돌무더기 천지였다. 무슨 돌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이 곳 석두성은 한나라때부터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 남아있는 모습은 청나라 때의 것들이다. 한나라가 서역을 경영할때는 여기있던 나라를 포리국(蒲犁國이라고 불렀단다.
이 성이 우리에게 의미있게 다가서는 이유는 당나라 시대의 장군 고선지(高仙芝)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고사계(高斯界)이다. 고사계는 고구려 멸망당시 고구려의 장수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난 고선지가 당나라에서 출세를 거듭하여 서역으로 진출하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나서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일은 대단한 사실임이 틀림없다. 그런 사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고선지는 종종 영웅 취급을 받기도 한다.
나는 그의 업적을 까내리고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우리나라를 위해 일을 한것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당나라 황제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인물이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가 여기까지 확대되어 있는데에는 고선지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위 사진지도에서 화살표로 표시한 것 가운데 A는 카스로 가는 방향을 의미한다. B는 당연히 파키스탄으로 가는 도로이다. 1번 지점이 석두성이다. 2번 지점은 중국군이 사용하고 있는 군사시설이므로 혹시 다음에 가게될 경우 그쪽으로는 접근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3번으로 표시한 지점은 푸른 풀들이 융단처럼 깔린 습지이다. 습지이니만큼 당연히 짐승들이 좋아하는 풀들이 가득하다. 그런 사실을 알고 이 글을 읽으면 사진과 글을 이해하기가 편할 것이다. 습지 한가운데 굽이굽이 돌아나간 것은 물길이다.
분홍색 점이 찍혀있는 곳 부근에 버스터미널이 있다. 우리가 묵고있는 호텔도 당연히 그 근처에 있다. 초록색 점이 있는 곳은 시장이고.....
한나라 시대때부터 청나라 때까지 석두성이 군대 주둔 요새로 사용된 유적지임을 돌비석이 증명해 준다.
성의 규모는 광대하다. 아까 문표 요금을 받던 아줌마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가 싶어 궁금해 했는데......
그녀는 입구 앞 가게에서 놀고 있었다. 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남자는 그때까지도 부추를 다듬고 있었다. 아까 우리가 사진을 찍으려고 할때 거절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결국 나는 석두성 성벽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그의 가게를 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타쉬쿠르간의 부추도 우리나라 부추와 생김새는 똑 같았다. 맛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석두성 유적지는 방치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나라 장군 고선지는 쿠차(庫車 고차)에서 여기까지 행군을 해오는데 20여일 정도 걸렸다고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쿠차의 위치가 궁금한 분들을 위해 아래에 지도를 올려드린다.
원판 지도는 영어판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왔으며 화살표와 위치 표시는 내가 첨가한 것이다. 중앙에 누렇게 보이는 부분이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우리는 나중에 분홍색으로 표시된 지역 속에 있는 도시인 야르칸드와 초록색으로 표시된 호탄을 거쳐서 파란색 비슷하게 색칠된 투르판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고선지는 여기에서 전열을 정비한 뒤 오늘날 파키스탄의 길기트를 근거로 하고 있던 소발률국을 치러 가게 된다.
나는 그런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곳을 그냥 보고싶었을 뿐이다.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고선지가 고구려인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당나라 조정에 충성을 바친 당나라의 장수였다.
동북공정이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역사왜곡 작업을 거쳐 우리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만주를 자기들 영토로 당연시하고 고구려 역사조차 자기들 역사라고 우기며 한반도까지 탐내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더 나아가 위구르인들이 지배하고 있던 신강과 장족의 영토인 티벳을 자기 영토라고하여 강제로 점령하고 나가기를 거부하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도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크게 느끼는게 없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던가?
고선지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해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나와 생각이 다른 분이 있더라도 이해해주기 바란다.
성터 너머로 보이는 푸른 장소는 거대한 습지이다.
나는 석두성 끝머리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푸르게 보이는 풀밭은 골짜기를 흘러온 강물이 너른 평원을 만나 사방으로 퍼져 흐르면서 만들어낸 습지이다.
습지 중간중간에는 게르가 보였다.
성벽 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집구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집 한쪽 구석에 짐승우리를 만들어 두고 그 속에서 양과 염소를 기르는 듯하다.
그런 짐승들을 습지에 풀어두고 키우는지 아니면 건초를 구해와서 먹이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짐승들을 방목하기에 멋진 초지가 석두성 부근에 뻗어있었다.
초록색 풀밭 위에 점점이 자리잡은 게르가 환상적인 경치를 만들어 주었다.
저런 규모의 건물이라면 학교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초라해서 사람이 살지 않는것 같아도 자세히 보면 거의 예외없이 여자들이 보였다.
습지가에 자리잡은 집을 살펴보기도 했다.
이 집에도 예외없이 짐승우리가 보였다.
이번에는 게르를 살펴본다. 너무 멀어서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내 짐작으로는 관광객을 위한 시설 같이 여겨졌다.
이따가 내려가서 게르를 찾아가 보리라고 다짐해본다.
과일 한두개로 배를 채운 우리들은 천천히 일어나서 석두성을 더 자세히 둘러보기로 했다.
예전같으면 여긴 난공불락의 성채로 비춰졌을 것이다. 습지쪽에서 공격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게 여겨진다.
성채밑으로는 민가(民家)들이 가득했다. 민가에서 바라보면 성채가 상당히 높게 보일 것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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