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왕릉으로 가까이 가서 무덤을 자세히 살필 차례이다.
괘릉은 흔히 원성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원성왕은 신라 하대(下代)의 임금으로서 서기 785년에 즉위하여 798년에 사망했다. 신라 19대 임금이었던 눌지왕의 아우인 복호의 11세손이라고 한다. 눌지왕이라면 그 유명한 충신 박제상과 관련있는 분이다.
그런 연대를 살았던 분이라는 것을 알면 저 앞에 보이는 석상들을 이해하는데도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시기는 중국의 당나라도 쇠해가던 시기이다. 중국 역사상 최전성기 가운데 하나가 당나라이다.
당시 당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은 수많은 서역 제국의 상인들과 외교사절들이 몰려들었던 국제적인 도시였다. 오늘날의 미국 뉴욕이나 워싱턴과 견주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혹시 당에 왔던 서역인들 가운데 신라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었던 것일까?
봉분 주위로 화강암 판석을 둘러쳤다. 당연히 거기에는 열두개의 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어떤 것은 형체가 아주 뚜렸하다. 누가 봐도 무슨 동물인지 쉽게 구별이 될 정도로 선명한 것도 제법 있다.
나는 돌아가며 하나씩 감상해보았다.
화강암은 상당히 단단한 돌인데 이런 조각작품을 새기려면 정말이지 예사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봉분 밖으로는 난간석을 둘렀다.
중국 만주 심양(=센양)에 가면 황태극의 무덤이 있다. 청나라 2대 황제로 알려진 인물인데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켜서 인조로 하여금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게 만든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무덤은 도굴이 불가능하도록 철저하게 덮어두었다. 얼핏보면 시멘트로 발라둔 것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이런 무덤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봉분에는 제비꽃이 수두룩 했다. 사실 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길이 없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역사의 기록과 무덤 양식 등을 보고 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이지 증거가 뚜렸하게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라의 왕릉 가운데 확실히 누구 것이라고 밝혀진 것은 손꼽을 정도이다.
왕릉을 둘러싼 소나무 숲도 제법 운치가 가득하다.
왕릉을 천천히 한바퀴 둘러본 나는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위에서 보면 더 확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인재 등용에 힘쓴 분이다. 전라도 지방에 남아있는 신라시대의 수리시설인 벽골제도 원성왕때 다시 증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 이 왕릉이 경주에 남아있는 왕릉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다.
인걸들은 모두다 사라지고 흔적들만 남았다. 나는 시내로 돌아가기로 했다. 불국사 기차역앞을 지난 뒤 7번 국도를 버리고 차량 출입이 아주 뜸한 아동 골짜기로 들어섰다. 그 골짜기를 지난 뒤 보문 관광단지로 나갈 생각인 것이다.
안쓰는 호텔 뒷마당에는 영산홍이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봐주는 사람이야 있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고 계절마다 멋진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골짜기를 한참 내려오자 밀밭이 나타났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밀밭을 감상했다.
이젠 이런 경치를 보는 것조차 호사스러운 일일것 같아서 말이다. 봄이 갈수록 무르익고 있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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