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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라안 여기저기 in Korea

다시 안동으로 1 - 임청각

by 깜쌤 2010. 5. 19.

 

  원래는 퇴계 오솔길을 걸어보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기차가 안동역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도산서원으로 가는 버스는 가버리고 난 뒤였습니다. 퇴계 이황선생이 청량산 부근에 사는 숙부님께 공부를 배우기 위해 오가면서 절경에 취해 시를 읊고 아름다움에 반해 감탄을 했다는 그 길을 걸어보기 위해서 간 걸음이었습니다만 모든 것이 다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계획을 수정해야했습니다. 다음 버스는 오후1시 10분인데 다녀오기에는 너무 늦어서 내려가는 기차를 타기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슬슬 걸어서 안동댐 부근의 민속박물관에 다녀오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중앙선 기차길이 위로 지나는 지하도 부근에는 길이 이리저리 얽혀있습니다만 표지판만 따라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자칫 황량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콘크리트 옹벽과 다릿발들에게 색깔을 입혀서 분위기를 바꾸었습니다.

 

 

 푸른 다릿발과 난간, 그리고 빨간 영산홍이 어우러져 5월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듯 합니다.

 

 

 안동국제 탈춤 페스티벌은 상당히 성공적인 평가를 얻은 잔치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볼때마다 어딘가 침체된듯한 경주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경주에는 매해 봄마다 술과 떡잔치라는 것을 열과 가을에는 신라문화제를 격년으로 엽니다만 그게 과연 경주를 얼마나 잘 홍보하고 효과가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안동댐 밑에 만들어진 보조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푸른 물과 돋아오르는 신록이 어우러져 제법 아름답습니다.

 

 

 바로 이 부근 저 어드메쯤에서 두개의 강이 합쳐집니다. 하나는 반변천이고 하나는 낙동강 본류가 됩니다. 반변천을 가로막은 것이 임하댐이고 낙동강 본류를 가로막은 것은 안동댐이 되는 셈이죠.

 

 

 

 

이 지도에서 안동시에 가깝게 표시된 것이 안동댐인 셈입니다. 안동시 부근을 보면 두개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안동댐으로 곧바로 가려다가 다리 부근에 임청각이라는 멋진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여기를 빠뜨린다면 너무 허무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곧바로 도로를 건넜습니다. 펜스가 쳐져 있는 것이 보일텐데 그것은 중앙선 철도를 따라 설치된 방음벽입니다.

 

 

 중앙선 철길가에 자리잡은 이 집이 임청각(臨淸閣)입니다. 그러면 잠시 이집의 유래에 관해 사단법인 고택문화보전회에 올라와 있는 자료를 그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임청각은 우리 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500년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니 안동 고성이씨의 대 종택 입니다 세칭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군자정)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었습니다 일제시대 철도 부설 때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건물을 철거당하고도 이런 규모를 보여주는 99칸 집이었습니다.

조선 세종(世宗:1418∼1450)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1368∼1429)의 여섯째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기에 자리잡음으로써 입향조가 되었고 이증의 셋째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 을 지낸 이명(李?)이 지은 별당형 정자입니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 가에서 시를 짖기도 하노라.’라는 싯구에서‘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입니다.

18세기 시(時)·서(書)·화(畵)·악(樂)에 일가를 이룬 허주(虛舟 ; 李宗邱 : 1726-1773)가 이집 주인이었고 특히 한말 독립운동가 아홉 분이 이집에서 출생한 충절의 집입니다 특히 석주(石洲) 이상룡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國務嶺=지금의 國家元首) 을 역임한 분으로 현행 헌법으로 국가원수에 해당합니다.

  

 

 그런 역사와 유래를 가진 집이니 어디가 달라도 남다를 것입니다. 얕으막한 담장과 회를 바른 하얀 벽이 정갈한 모습으로 다가섭니다.

 

 

 이제 대문으로 들어가봅니다. 대문에 붙여둔 입춘첩(立春書)의 글씨도 보통이 넘는 솜씨임이 분명합니다.

 

 

 99칸 집에서 상당부분이 헐리고도 이정도라면 정말 대단했겠다는 생각부터 떠오릅니다.

 

 

 별당인 군자정(君子亭)으로 올라가 봅니다.

 

 

독립운동가를 수없이 길러낸 집안답게 훈포장과 표창장들이 수두룩 합니다. 시시한 단체에서 주는 것은 거의 없고 모두들 격이 있는 것들 뿐입니다.

 

 

 안에 들어가서 숨을 고르며 선현들의 발자취를 더듬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계단에 서서 낙동강을 바라봅니다.

 

 

 잠시 안채를 기웃거렸습니다. 사람이 사는 흔적이 보였습니다만 일부러 그분들 모습을 사진찍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하겠습니다.

 

 

깜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