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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9 일본-서부 일본(完)

오카야마 성으로 2

by 깜쌤 2009. 6. 2.

 

 성문을 통해 들어가서 왼쪽을 보면 월견로(月見櫓 츠키마야구라)라는 건물이 보인다. 이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2차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무너진 모양이다.

 

 

 무슨 대단한 인심이라도 쓰는 양 무료 공개를 한다기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공짜로 보여준다는데 왜 안올라가겠는가? 일년에 한번 그런 행사를 한다는 식으로 광고를 하는 것 같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우키다 가문의 후손인지 아니면 이케다 가문의 후손들인지는 모르지만 원로 비슷한 양반들이 앉아서 질서를 잡고 있었다.

 

 

 그들의 지시에 따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무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 보았다.

 

 

 강 건너편 코라쿠엔이 보이고......

 

 

 코라쿠엔으로 건너가는 월견교(月見橋)가 보였다.

 

 

 월견로는 아마 망루 구실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거기에서 보는 경치가 제법이었다.

 

 

 어느 정도 살펴본 우리들은 다시 내려왔다. 성벽의 총안(銃眼)이다. 안에서는 밖을 보기 쉽게, 하지만 밖에서는 안을 보기 어렵게 만들어 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성안에는 클로버가 가득했다. 하얀꽃이 가득 피어서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천수각의 위용도 대단하다.

 

 

 너른 마당에는 다양한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무료로 나누어주는 꽃씨 몇 봉지를 얻어왔는데 올해는 아직 심어보지를 못했다. 

 

 

 이제 천수각이 있는 마당으로 들어간다. 사진에 보이는 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왔다.

 

 

 천수각 앞 마당에는 연산홍이 가득했다.

 

 

 드디어 천수각의 정면이 눈에 들어온다. 별명 그대로 검은색이다. 오카야마 성의 별명은 까마귀성이란다. 까마귀성이라면 유우죠오(오성 烏城)로 쓸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오카야마에서 동쪽으로, 그러니까 교토와 오사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히메지(姬路)라는 도시가 나온다. 거기에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 가운데 하나라는 백로성이 있다는데 그 성에 비교해서 까마귀 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백로성과 오성은 원래 우키다 가문에서 소유를 했던 모양이다. 다른 자에게로부터 뺏은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원래 이성은 1597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 진행중이던 시절에 지어졌다는 말이다. 당시 성주였던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우희다수가)는 우리나라에 일본군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쳐들어왔던 인물이다. 그 자의 모습을 잠시 소개한다.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아니었던가? 물론 히데요시가 죽고난 뒤 그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의 편을 들어 세키가하라 싸움에 참가하지만 지게 됨으로서 패가에 망신까지 당하게 되는 것이다.

 

 

 천수각 앞 마당에서는 여러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었지만 우키다 집안의 행적을 대강 아는지라 모멸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눈으로만 쳐다보고 만다.

 

 

 지금 남아 있는 천수각은 1966년에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재건한 것이다.

 

 

 여기오카야마 성은 비옥한 농토를 배경으로 하여 일본 역사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다이묘오들을 다수 배출한 곳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의 세력만을 놓고 보더라도 우키다 히데이에는 57만석(萬石)짜리 영주였으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던 것이다.

 

이순신이 전쟁 중에 불려가서 심문을 당하게 된 핑계가 무엇이었던가? 적장 가토오 요마사의 목을 가져오라고 했던 선조의 명을 실행하지 못했으니 왕명을 능멸한 자라는 누명으로 불려간 것 아니었던가? 선조에게는 가토오 기요마사의 목을 치는 것이 제 주머니 속에서 구슬을 꺼내는 일처럼 쉽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 가토오 기요마사만해도 24만 5천석 정도의 다이묘오였다는 것만 보면 우키다 히데이에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가토오 기요마사가 만든 쿠마모토 성은 예전 글에서 소개한 바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마당이지만 사람들이 들어가 마구 설치는데는 별도리가 없다. 실제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해 두었다.

 

 

 한쪽에서는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중에 이 성의 최후 소유자는 이케다(池田)가문이 된다.

 

 

 우리돈으로 12,000원이나 되는 거금을 내고 들어가 볼 일까지는 없겠다 싶어서 안들어가고 만다.

 

 

 자료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오카야마 성의 연혁을 찍어두었다.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의 모습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유심히 보고는 사진을 찍었다.

 

 

 이놈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대광사라는 절에서 소장하는 작품인가 보다.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인물 1위나 2위에 단골로 오른다는 작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이토오 히로부미 정도로 손꼽히는 모양이다.

 

 

 나는 착잡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남북 분단의 실제적인 원인 가운데 중요한 한가지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데서 이어지는 사건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분단의 원인과 책임은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본다. 총안 앞에 서서......

 

 

2차 대전이 끝난 뒤 일본이 남북으로 갈라져 남일본 북일본으로 분단되고는 북일본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남일본을 위협하는 그런 일이 생겨나야 정상이 아니던가? 그런 짓을 왜 우리가 하고 난리란 말인가 말이다.

 

 

 일본이 분단되었으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일본이 19세기 중반에 개국을 하며 처신한 행동을 보면 일본 분단의 가능성은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말씀이 될 것이다.

 

 

 갑자기 속에서 욱하는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 남 탓할 것 없다. 다 내탓이며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며 내가 바보였던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일본에게만은 꼭 이겨야 한다. 일본에게 이기면 우리도 초일류가 된다.  

 

 

 나는 코라쿠엔으로 건너가기 위해 월견교로 들어섰다.

 

 

 다리에서 돌아본 오카야마 성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코라쿠엔이 있는 강 건너편에는 찻집이 보였고......

 

 

 찻집 부근 매점에는 여러가지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오카야마 성! 보고나니 왠지 마음이 씁쓸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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