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대에서 내려온 우리들은 처음 차를 세웠던 화천서원의 지산루 앞 유통문전(前)을 지나칩니다.
화천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형이 되는 겸암 류윤룡 선생을 기려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법 단정합니다. 옛날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선인(先人)들의 향취가 그득합니다.
겸암선생은 주역에 제법 밝았던 분으로 알려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명문(名門)은 어디가 달라도 다른 것 같습니다. 훌륭한 조상을 두었다는 것도 자기 복에 해당될 것입니다.
우리는 강가로 접근해보았습니다.
강가에 우뚝 솟은 소나무 한그루가 제법 정겹습니다.
옥연정사 같습니다.
고즈녁한 곳에 자리잡았습니다. 이런 곳은 비가 오는 날 방문해야 멋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강변의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신록이 조금씩 움트는 계절에 와야 보기가 좋지 싶은데요..... 작은 나무 가지에 새집이 하나 매달려 있었습니다.
앙증맞은 새집이었습니다.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 집을 만들기 위해 손도 없는 새가 부리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싶어 가슴이 아려옵니다.
건너편에 자리잡은 하회마을이 지척거럼 가깝게 느껴집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자주 홍수가 났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던 시절이라 조금만 비가와도 붉은 물이 무섭게 소용돌이치며 온갖 것들을 모아 휘감으며 떠내려갔습니다.
청솔가지를 오랫만에 봅니다. 경상도 사투리로 소깝(소깦, 속깝)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경찰이 와서 땔감으로 해다놓은 푸른 소나무 가지를 적발하는 날은 동네 전체가 공포에 떨었던 날도 있었습니다.
유성룡 선생의 시를 새긴 비석입니다.
우리말로 옮겨두었습니다.
집 안쪽에는 조용한 분위기가 가득 스며 들어 있었습니다.
집앞 빈 마당 한구석에 세워둔 자동판매기를 가린 울타리가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저런 담장을 세워두고 경계를 삼았던 우리 조상은 참으로 너무 순박하기만 했었습니다.
갑자기 아득히 먼곳으로 흘러보낸 옛날 일들이 생각납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갑자기 더 예뻐지기 시작했던 친구 누나의 발그스름했던 볼이 기억나기도 했고....
노란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곱게 따았던 다른 친구의 누님도 생각이 납니다.
광주리 속에다가 호미를 넣고 봄나물을 캐러 나가던 누나도 생각납니다.
나는 처음에 여염집인가 싶어서 발걸음을 안으로 옮겨넣지를 못했습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도란도란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서글픔을 느끼게 됩니다.
가버린 세월들이 옛이야기라도 되어 돌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나는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더 머물러보면 볼수록 가슴이 아려오기 때문입니다.
유진오씨의 창랑정기가 생각났습니다.
한강변에 자리잡았던 커다란 고택의 일부였던 창랑정에 출입했던 어린 날들의 기억을 쓴 글이죠.
나는 다시 한번 강변의 소나무를 훑어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던 것입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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