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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8 조지아, 터키-두 믿음의 충돌(完

다소 가는 길 3

by 깜쌤 2008. 11. 6.

 

 이렇게라도 정비를 해놓으니 보기가 좋다. 워낙 고대의 유물과 유적이 풍족해서 그런지 내가 보기에도 범상하지 않은 돌조각이 그냥 굴러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의도적으로 배치해둔 것이라고 알지만 말이다.

 

 

 

 

 

 대리석에다가 이렇게 섬세한 조각을 한 고대인들의 솜씨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놀란 것 가운데 하나가 동상을 만든 솜씨와 대리석에다가 조각을 한 솜씨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가운데 "돌을 떡주무르듯 한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고대 그리스 로마사람들이 바로 그랬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터키 서부 에게해 부근과 남부의 지중해 해안지대에 그리스 유물이 지천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고대에는 이 지방들이 모두 헬라(=그리스)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것이다.   

 

 

 

 

 

<이 글 속에 등장하는 모든 지도의 출처는 미국 야후이다. 지도를 가져와서 조금씩 손을 보기도 했음을 밝힌다.>

 

바울은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다메섹)에 살고 있는 유대인 가운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잡아내어 매운 맛이라도 보여주겠다는 나름대로의 열심을 품고 그리로 가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어 회심(回心)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서 아라비아의 광야(혹은 사막)에서 더 깊이 성경을 공부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끝낸 뒤에는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의 행적이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위의 지도는 세차례에 걸친 바울의 전도여행중 두번째 여행의 여정을 나타낸 지도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터키, 그리스 등의 나라를 돌아다닌 셈이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이니 그는 걷거나 말을 타거나 배를 타고 다니며 선교사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지금의 우리가 봐도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바울 사도의 진정한 가치는 엄청난 거리를 걸어 전도 여행을 했다는 것과 복음에 관한 수많은 권면의 편지와 해설서를 남겼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성경에 대해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도 그분이 남긴 글을 보면 볼수록 그는 대단한 천재였음이 확실하다. 바울 같은 분이 없었더라면 어찌 우리 같은 사람이 복음의 깊은 진리를 이해하고 알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집터에는 온갖 꽃들이 가득했다.

 

 

 

 

 기둥을 열주처럼 늘어놓아 제법 세련된 느낌이 들게 한다.

 

 

 

 

 부근에는 모스크의 미나렛이 솟아 있다. 시간이 되면 아잔이 흘러나오고......

 

 

 

 

 어느 정도 둘러본 우리들은 서둘러 나와야만 했다. 카파도키아로 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바울은 로마까지 가게되고 결국은 로마에서 순교하고 만다.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에 가면 포로 로마노 유적지 부근에서 바울이 갇혔던 감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소에 가면 교외에 아름다운 폭포가 있어서 한번쯤은 꼭 가볼만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우리들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우린 아쉬운 마음을 안고 떠나기로 했다.

 

 

 

 

분홍색꽃을 가득 달고 있는 저 꽃은 뷰겐빌리아 나무이지 싶은데..... 그런 것을 보면 여기는 확실히 온난한 기후를 가진 것 같다.

 

 

 

 

 우리는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 큰 길로 나가기로 한다.

 

 

 

 

 오토가르(=버스 터미널)로 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다시 큰길로 나온 우리들은 시내버스를 타고 오토가르로 향했다. 여기 다소에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만나기도 했었다. 그들은 안디옥에서 만나기도 했었고......

 

 

 

 

 교통신호는 있으나 마나 한 것 같았다. 15초 남았다는데도 신호를 무시하고 모두들 마구잡이로 건너고 있었다. 그럴 땐 신호가 바꾸어지기를 기다리는 우리만 바보가 된듯한 기분이 든다.

 

 

 

 

 오토가르에 오니 6시가 넘었다. 대합실 안에 즐비한 버스 회사들 사무소에 몇군데 가보았지만 모들 한결같이 가파도키아 지방의 카이세리로 가는 버스는 이제 더 이상 없다고 한다. 그러면 곤란하다. 저녁에 출발하는 버스표를 못구하면 다소나 아다나에서 자야한다는 말이 된다. 그럴 경우 우리 일정에서 반나절 정도를 손해보게 된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메트로 회사 사무실에 가서 알아보니 6시차가 있다고 한다. 6시에 출발해야 하는 차가 늦어서 오는 모양이다. 얼른 표를 사서 기다렸더니 과연 조금 후에 버스가 들어오는게 아닌가? 우린 그렇게 해서 카이세리로 가는 차표를 구해서 버스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리니 신기하기만 하다.

 

    

 

 

 

 하지만 너무 좋아할 것도 없었다. 거리와 소요시간으로 짐작해 볼때 우리는 자정 경에 카이세리에 도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버스터미널에서 밤을 새우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타르수스(=다소) 터미널, 안녕~~ 우린 그렇게 다소를 떠났다.

 

 

 

 

 차창 가로 너른 포도원이 펼쳐졌다.

 

 

 

 

차안에서부터 배가 살살 아파진 나는 아다나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운전기사에게 이야기를 하고 버스에서 내려서는 정신없이 화장실부터 찾아갔다. 출발 시간에 �겼는지 나중에는 차장이 화장실까지 찾아오는게 아닌가?

 

 

 

 

 아다나에서는 많은 승객들이 올라타서 자리를 거의 다 채웠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방향을 북쪽으로 틀더니 드디어 카파도키아의 대표적인 도시인 카이세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내 앞자리에는 아주머니가 앉았는데 딸로 보이는 초등학교 3,4학년쯤 되는 여자 아이가 우리들을 보고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를 보며 연방 미소를 날리던 그 꼬마 아가씨는 이윽고 나에게 빼빼로 비슷한 과자까지 건네주게 되었다. 하지만 말이 안통하니 이야기를 나눌 길이 없다. 작은 선물조차 가진 것이 없었으니 미안하기 짝이 없었고.....

 

 

 

 

 그러다가 나는 잠이 들었다. 자야한다. 안자면 나만 손해이므로 그저 자야만 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