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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8 조지아, 터키-두 믿음의 충돌(完

하란 4 - 시골집

by 깜쌤 2008. 10. 18.

 

   하란은 역사적인 도시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지 않더라도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펼쳐졌던 곳인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공화정 로마시대에서 삼두정치(三頭政治)가 등장했을때 그 삼두 가운데 한명이었던 크라수스가 이 부근에서 전사한 것을 들 수 있겠다. 로마 역사를 포함한 서양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짝에나 쓸모없는 이야기이겠지만 자연환경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잠시 꺼내보기로 하자.

 

기원전 55년 11월말경에 이탈리아 남부의 브린디시에서 그리스로 건너가서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동방의 강대국이었던 파르티아(오늘날의 이란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왕국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원정에 나서게 된다. 당시 그는 로마 최고의 부자로 알려진 사람이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져) 및 폼페이우스와 더불어 삼두정치 체제를 만들고 로마를 통치했던 인물이었으니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는 한개 군단이 6천명으로 구성되어 있던 로마의 7개군단을 거느리고 파르티아 원정길에 나선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중무장 보병 29,600명,과 경무장 보병 4천, 기병 4천을 거느리고 출발을 했던 모양이다. 이에 맞서 싸웠던 파르티아 왕국의 장수는 수레나스라는 인물이었다는데 아주 출중했던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수레나스는 강력한 활로 무장한 1만기의 경기병들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활로 무장한 군대의 약점은 화살이 다 떨어지면 쓸모없는 부대로 전락한다는 것이었지만 그는 사막의 기후에 잘 적응하는 낙타의 특성을 이용하여 낙타등에 화살 1천여개씩을 실어서 싸움터로 나갔다고 한다. 유프라테스 강변에서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실전 경험은 없으면서 허황한 명예욕에만 이끌리어 별다른 작전도 펼치지 못한 크라수스의 로마 군대를 먼거리에서 석궁(石弓)수준의 강력한 화살로 공격하여 괴롭혔던 모양이다.

 

둥근 타원형 방패를 가지고 화살을 막아내고 있던 로마군을 포위하고는 말을 탄채로 로마군 화살의 사정거리 밖에서 유유히 화살을 날리는 수레나스의 군인들에게 로마군대는 방패까지도 �릴 정도의 화살 위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나중 몽골 대초원에서 일어나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칭기즈칸의 군대도 그런 전법을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패퇴를 거듭하던 크라수스의 군대가 카레라는 도시를 향하여 후퇴하던 도중, 기원전 53년 6월 12일 수레나스가 제안한 강회회담에 나갔다가 적의 함정에 빠져 죽고만다. 파르티아 쪽의 전설에는 크라수스가 황금액을 마시고 죽었다고 하지만 장군이 포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로마군 장교 가운데서 누가 글라디우스 검(로마 군인들이 쓰던 짧은 양날 검)으로 찔렀다고도 전해진다. 당시의 카레가 오늘날의 하란이다. 오늘날의 하란은 푸른 밭으로 둘러싸인 마을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33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기원전 21년 5월 12일, 로마는 파르티아와 강화조약을 맺고 크라수스의 군대와 나중에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빼앗긴 은독수리 깃발을 모두 돌려받았다. 군단기인 은독수리 깃발을 돌려받을 당시의 로마제국 지도자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인 것이다. 로마는 당시에 붙들려간 포로 약 1만명 가량의 반환을 요구했는데 돌려받은 포로는 없었다고 한다. 모두 다 죽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하는데 포로는 돌려받지 못했지만 포로들이 입었던 갑옷과 사용하던 무기까지 반납받아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런 사실과 비교해볼 때 한국전쟁에서 포로로 붙들려간 국군장병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한 우리나라의 처사를 생각해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혹시 월남에서 실종되어 아직까지 억류되어 있거나 북으로 끌려간 우리 병사는 없는 것일까? 얼마 전에만 해도 한쪽에서는 바다 위에서 우리 군인들이 교전을 하다가 죽어나가도 누구하나 위로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해보며 나는 국가의 정체성이 과연 어때야 하는지를 되새겨 보았었다.

 

하란을 들어서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먼저 해보았다. 엄청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온갖 일이 다 벌어진 곳인데 그런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이니 감회가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경속의 등장인물 이야기도 함께 떠올리며 말이다. 그 이야기는 좀 뒤에 하기로 하자.

 

 

 

 

아지즈씨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마을을 가로 질러 제일 먼저 하란 하우스라는 곳으로 가서 우리를 내려 주었다. 팽이를 거꾸로 세운 모습의 집이라고 해야하나? 많은 글에서는 이 동네 특유의 집 모습을 벌집 모양의 집이라고 묘사를 해두었다.

 

사진으로 보면 알겠지만 정리가 되지 않아서 상당히 지저분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집들은 거의 모두가 흙으로 만들어졌다. 오면서 경치를 봐서 알겠지만 나무와 돌들이 거의 없는 곳이니 흙 말고는 집을 지을 재료가 없는게 당연하다. 

 

이 마을의 역사는 5천년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마을 중에서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온 동네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역사가 녹아있다는 말은 이런 곳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란 에비(=하란 하우스) 앞에다가 차를 세운 후 안으로 들어갔다. 입장료는 없었다. 안에 들어가서 밖을 보면 사진처럼 보인다. 마당 한가운데 있는 절구와 떡메 비슷한 도구를 보면 우리나라 농촌에 와 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밖은 벌써 찌는 듯이 더웠다. 한창 더운 날에는 낮 온도가 섭씨 50도까지 올라간다니 할말이 없을 정도이다. 둥근 원뿔 모습으로 쌓아올린 저 지붕아래에 들어가서 위를 보면 바로 아래에 있는 사진처럼 보인다.

 

 

 

 

 짚을 섞은 흙벽돌을 위로 올라가면서 안으로 들여가며 좁게 쌓아 둥근 모습이 되게 만들고 꼭대기는 비워 두어서 채광과 환기가 되게 했다.

 

 

 

 

 흙집 속에 들어가보면 냉장고 속에 온 것처럼 시원하다. 이런 것은 침대용으로 쓰는 것일까? 바닥재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다리가 달린 평상 모습으로 만들어 생활하는 것이 제일 편했을 수도 있겠다.

 

 

 

 

 

 봉창이다.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라고 할때의 봉창 말이다.

 

 

 

 

 여긴 벼농사를 짓는 곳이 아니니까 집을 지을때는 진흙에다가 보릿짚이나 밀짚을 잘게 썰어 넣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을 넣어야 응집력이 생겨 벽돌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꼭 같은 비유는 아니지만 오늘날 시멘트 구조물을 만들때 철근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내가 어렸을 때 본 우리나라 흙벽돌집과 무엇이 다르랴? 봉창을 유심히 보면 흙벽의 두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로는 50센티미터는 너끈히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엄청 시원한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침구를 쌓아놓은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시골풍경과 거의 비슷하다. 나는 처음 제일 위에 올려둔 것을 보고는 강화도 특산물인 화문석으로 착각할뻔 했다.

 

 

 

 

 

 이럴땐 내가 공부를 많이 하지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비교민속학같은 학문을 전공했더라면 논문을 쓸만한 재료는 부지기수로 널렸겠다.

 

 

 

 

 통양가죽부대이다. 그 속에 우유를 넣어 계속 흔들어서 버터를 만들때 썼다고 한다. 중국서부 황하 상류지방에서는 통양가죽에다가 공기를 넣어 뗏목 대용으로 쓰기도 하던데......   어떨 땐 물을 넣어 물통으로 쓰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유물은 근세의 것이리라.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물건이다.

 

 

 

 

 다른 방에 들어서니 민속의상을 벽에 가득 걸어두었다. 빌려입고 사진을 찍을 때 쓴다. 물론 공짜는 아닐 것이다. 색깔들이 아주 화려했다.

 

 

 

 

 여기는 침실 같다. 이들이 카페트를 바닥에 깔기 시작한 것은 언제 쯤부터일까?

 

 

 

 이렇게 방석이 놓여진 곳은 틀림없이 응접실 공간일 것이다. 한개의 집은 여러개의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응접실 벽면을 아주 예쁘게 장식해두었다. 화려하다. 

 

 

 

 

 어느 정도 둘러보고 마당으로 다시 나왔다. 벽면에 걸린 농기구만을 중심으로 보면 우리나라 시골같다.

 

 

 

 

 이것은 예전 우물터이다.

 

 

 

 

 밖은 엄청나게 더워도 흙벽돌 집 속으로만 들어가면 아주 시원해서 충분히 견딜만 했다.

 

 

 

 

 의자와 탁자이다. 어떻게 사용할 것 같은가?

 

 

 

 

 우리는 그렇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음료수로 목을 축였다.

 

 

 

 

 우리나라 농가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맷돌의 모양은 어떻게 이렇게 같을 수가 있는가? 어처구니가 보이지 않지만 우리나라 맷돌의 모습과 크기나 모양이 너무 똑같아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이다. 어처구니란 맷돌의 손잡이를 말한다. 곡식이나 맷돌은 준비되어 있는데 어처구니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저 수레는 아무래도 물건 운반용이라기보다 전투용같이 느껴졌다. 파르티아와 페르시아의 전차부대는 예로부터 그 위력이 대단하였다고 정평이 나 있다.

 

 

 

 

 화장실을 현대식으로 개조해서 손님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흙벽돌집 속에 현대식 화장실이라니 제법 그럴듯 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제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싶다. 나는 이렇게 말갛게 쓸어놓은 흙마당이 너무 좋다.

 

 

 

 

 

흙지붕 아래 한쪽엔 냉장고까지 넣어둔 현대식 부엌이 자리잡고 있었다. 찬물을 사먹었더니 속까지 다 시원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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