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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8 조지아, 터키-두 믿음의 충돌(完

반(Van), 안녕 ~~

by 깜쌤 2008. 10. 14.

 

 우리는 다시 다음 성채로 건너가야만 했다. 아까처럼 절벽을 기어오르는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성벽의 일부분은 복원한 흔적이 보였다.

 

 

 

 

 이런 유적은 우라르투 시대의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기원전 약 3000여년 경부터 이 부근에는 도시국가들이 등장했던 모양이다. 사실 문명의 기원으로 치면 메소포타미아 지방이 이집트 문명보다 앞서 있다는 것이 거의 정설같다. 성경 기록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터키 동남부 부근에서 번져나가기 시작한 문명의 흔적이 일단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꽃을 피우고 얼마있지 않아서 이집트 문명이 태동한다.

 

그리고 곧 이어서 인더스 문명이 시작한다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현상이 아니던가? 그로부터 제법 시간이 지난 뒤에 황하문명이 발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더스 문명의 위치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인도 국경지대에 해당한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공통적인 문자는 처음에는 설형문자였다는 사실도 흥미를 끈다. 그러다가 나중에 페니키아(성경에서는 베니게로 기록되어 있다)에서부터 오늘날 우리들이 쓰는 알파벳의 원형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도의 출처는 지도 속에 인터넷 주소가 표시되어 있으니 참고로 하시기 바란다.

고대문명들의 위치관계를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사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지도에서 제일 왼쪽이 이집트 문명권이고 가운데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며 제일 오른쪽이 인더스 문명권이다. 옥색 선은 가져온 지도를 바탕으로 해서 내가 그은 것이다.

 

 

 

 

 여기 반 호수 부근은 저번 글에서도 언급한대로 우라르트 왕국의 중심지였다. 그들이 오랜 세월동안 앗시리아를 포함한 이웃들과 경쟁을 하면서 투쟁을 했다는 사실이 여러 기록과 금석문에 증거로 등장한다는데.... 

 

 

 

 

 저기 앞쪽에 미나렛이 등장한다. 흥미롭다.

 

 

 

 

 사진 중앙에 부두처럼 보이는 곳에서 호수 건너편에 있는 타트반으로 사는 배를 탈 수 있는가 보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성벽밑을 따라 가다가 성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반 시내쪽을 돌아다 보았다. 성벽의 경사각이 상당히 매섭다.

 

 

 

 

 어떻게 이런 곳에다가  성을 구축할 생각을 했을까?

 

 

 

 

 옛날 사람들의 지형을 살피는 안목이 놀랍다. 트로이나 아테네, 이스탄불 등지를 둘러보면서 감탄한 적이 있다. 그렇다. 도시를 만드는 안목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경제구조, 전쟁기술, 교역 상태, 생활 환경등이 어우러져 도시의 위치가 정해지고 성장한 것이지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면 그렇게들 다 싸우고 뺏고 빼앗기고 해야만 속이 시원했을까?

 

 

 

 

 견고한 돌로 된 요새가 있는가 하면 진흙과 돌로 쌓은 유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한쪽 언덕을 방어선으로 삼고 호수쪽으로도 방어선으로 삼는다면 성벽을 쌓을 곳은 평지쪽 뿐이다. 평지쪽도 한방향은 습지를 면하도록 한다면 접근로는 한쪽 뿐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고대의 호수 수면 높이는 어느 정도였을까? 언덕 밑으로 보이는 이 터전 모두가 우라르투 시대의 유적인 모양이다. 이젠 모두 다 사라지고 흔적 몇 개만 남아있다.

 

 

 

 

 관리상태는 엉망이었고 부실했다. 복원은 꿈도 꾸지 못하는 모양이다.

 

 

 

 

 미나렛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대단하다. 나도 올라가볼까 하다가 남의 나라 유적을 너무 등한시 하는 것 같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이 정도만 보아도 오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이젠 돌아서는게 낫지 않을까?

 

 

 

 

 우리는 돌아나가기로 했다.

 

 

 

 

 성문을 통해 나가서 얼마만큼 가다가 나는 혼자서 유적지를 서성이는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이~"

"어디서 오셨소?"

"#$%^&*에 살고 있는데 여기 구경온 것이오. 당신들은?"

"우린 한국인이오. 내 동료들은 먼저 내려가고 나는 뒤따라 가는 중이오."

"반갑소.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대단한 나라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나는 많은 한국인들을 보았소. 그만큼 잘 살기 때문에 여기까지 구경오는 것 아니오? 그런데 말이오, 도대체 한국인들 수입은 어느 정도가 되오?"  

 

 

 

 그는 쿠르드 민족의 터키어 선생이이었다. 고등학교에서 쿠르드 민족 아이들에게 터키어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쿠르드인으로 태어나 터키어를 가르치는 기막힌 현실이 우습다는 듯이 보였다.

 

 

 

 

 

위 지도의 출처는 미국 야후이다. 미시간 대학교가 원출처이지 싶다. 지도 속에서 밝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이 쿠르디스탄이라고 할수 있다. 쿠르드 민족의 거주지라는 말이다. 한때 이라크를 다스렸던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영토내의 쿠르드 사람들을 독가스로 대량학살한 사건은 유명하다. 미국이 싫다는 이유로 사담 후세인을 영웅시하는 태도를 보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과연 사담 후세인이 영웅적인 순교자이며 희생자일까?

 

쿠르디스탄의 정확한 범위는 학자들마다 엇갈리므로 위 지도 자료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말기 바란다. 우리는 오늘 밤 야간버스를 타고 쿠르드 민족의 거주지를 계속 통과해 나갈 것이다.

 

 

 

 

 

 "나는 다행히 우리 민족의 말과 터키 말을 알므로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소. 하지만 우리들 앞 세대는 다릅니다. 우리 앞세대는 병원에 가도 터키말을 알아야 진료를 받을 수 있으므로 문제가 심각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우리들을 터키민족으로 알고 스쳐지나가지만 우리가 당하는 슬픔과 압제로부터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도 예전에 일본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아보았으므로 대강은 알고 있소."

"당신도 어느 정도는 배운 사람같은데 부디 우리 민족의 이 슬픈 현실을 당신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주시기를 바라오. 그들은 터키 말을 사용하도록 우리들에게 강요하고 있소.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져가니 정말 큰일이오. 그리고 말이오, 터키에서는 교사보다 경찰과 군인들에게 훨씬 더 많은 봉급을 준다오. 그러니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직업을 가지길 원하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돌아올 결과가 어떤지  대강 짐작이 되겠소?"

 

 

 

 나는 그의 눈빛 속에서  차별당하고 억눌림당하는 나라없는 소수 민족의 진한 슬픔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일부러 그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혹시 나중에라도 알려져서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되어서였다. 

 

 

 

 

 마음이 무거웠다.

 

 

 

어찌 무겁지 않을 수 있으랴? 어떤 사람들은 터키 동부지방 여행하기를 꺼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쿠르드 민족의 지도자였던 압둘라 오잘란은 1999년 터키 특수부대원에게 체포되어 현재 수감중이다. 국제사회가 나서서 그의 사형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그는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시내로 부지런히 걸어나가야 했다.

 

 

 

 

 불임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자미를 뒤로 하고 걸었다.

 

 

 

 

 정신없이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야간버스를 타기 위해서 말이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