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다마르 섬이 가까워지자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아르메니아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회 앞에 선착장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 배에 같이 탄 사람들은 아주 쾌활한 사람들이어서 떠들면서 사진을 찍으가면서 아주 난리부루스를 피워댔다.
그러나 이들은 섬에 도착하자 태도를 돌변시켰다. 아주 숙연해지며 경건해진 모습으로 변했던 것이다.
섬 한쪽에 이곳이 터키 영토임을 밝히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하늘 한쪽을 날아가던 구름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살짝 자리를 옮기자 섬은 금새 환해졌다.
엄청난 여름 더위에 말라버린 풀이 듬성듬성한 가운데 나무들이 몇그루 자라고 있었고 그 사이에 교회가 떠억하니 버티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기만 한데 어찌 너무 조용한 분위기였다.
배에서 먼저 내린 사람들은 모두 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교회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리는 사진의 왼쪽 숲이 있는 곳에서부터 타고 건너온 것이다. 한 20여분 정도 걸린다고 봐야하나? 섬에서 육지까지의 거리는 약 3킬로미터쯤 된다고 한다.
호수물은 아주 맑았는데 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천천히 걸어서 교회를 향해 갔다.
얼핏 보아서는 붉은 빛이 섞인 돌인지 아니면 진흙벽돌인지 구분이 안 된다.
호수 건너편 마을에는 숲이 그득했다.
교회입장료는 없다. 터키 경비원이 지키고 있지만 크게 간섭하면서 통제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상단 벽면에는 아름다운 부조가 가득함을 볼 수 있다.
배에서 함께 타고온 사람들은 우리보다가 먼저 들어가더니 경비원을 다독이며 무엇인가 부탁도 하고 사정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들은 벽면 움푹한 곳에 촛불을 켜고 묵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아르메니아 민족임을 깨달았다. 아르메니아계 터키인들인 것이다. 예전에 터키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땅은 원래부터 아르메니아 영토였던 것이다.
교회의 옆벽면과 천장에는 프레스코화들이 즐비했지만 상당히 훼손되어 있었다. 내부나 외부가 모두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돔 바로 밑 유리창은 한때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지 않았을까? 여긴 겨울이 아주 추운 곳이므로 지금처럼 뻥뚫린 채로 놓아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 이 지방은 터키 안에서도 대표적인 대륙성 기후라고 한다. 그 말은 겨울이 춥고 길면서도 여름엔 아주 무덥다는 이야기가 된다.
프레스코(Presco)화(畵)란 일종의 석회그림이라고 보면 된다. 건물에 회벽을 바르고 회벽이 굳어버리기 전에 안료가루를 개어 그 위에 그림을 그리면 회벽이 굳으면서 함께 그림이 들어가 박혀버리는(?) 방법으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오래가는 점도 있지만 석회가 떨어지면 그림도 함께 훼손되고 마는 약점이 존재한다.
누구를 그린 것일까?
길다고 생각될 정도로 키가 컸던 아르메니아 청년은 촛불을 켜두고 조용히 기도를 했다.
"어디서 오셨소?"
"터키요."
"아르메니아 사람이오?"
"그렇소."
"왜 기도를 하오."
"우린 크리스챤들이오. 그러니 기도를 하는게 아니겠소?"
그러면서 그는 경비원을 증오심이 섞인 눈초리로 흘낏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과 말투에서 서글픔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 안에서 소수민족으로 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20세기 초반에 벌어졌던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엄청난 수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학살당해서 터키와는 뿌리깊은 원한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튀르키예족과 쿠르드족을 포함하는 터키 사람들이 아르메니아 사람들에 대해 아주 씨를 말리고 싶다는 의도로 대살륙을 저질렀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로 대량학살을 했던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말기에는 약 250여만명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터키 영토내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제일차 세계대전 중에 약 175만명 정도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터키를 떠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이나 시리아 지방으로 이주하도록 추방을 했다. 이주 과정에서 약 65만명 정도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인 것이다.
그러니 아르메니안들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가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말이다, 이 땅은 현재는 쿠르드 민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땅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터키, 즉 투르키예 민족이 여기를 점령하고 탄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중국이 티벳을 점령하고 장족을 탄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오스만 투르크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압제에 휘둘리던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독립운동이 원인이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절대다수인 이슬람과 소수인 그리스도교인 간의 갈등도 원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 나와 바깥 벽면의 부조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벽면의 부조가 아름답기만 했다. 오른쪽 벽면에 물맷돌을 들고 있는 청년은 아무래도 다윗(David)같고 그 옆의 거인은 골리앗일 것이다.
서기 921년 당시 이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바스푸르칸 왕국의 가긱 아르트즈루니는 여기에 궁전과 교회와 수도원을 지었다. 궁전과 수도원 건물은 거의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교회 건물은 아직까지 남아서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들이고 있는 중이다. 이제 이 섬은 터키 사람들의 피크닉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아름다운 부조가 교회 건물 사방을 둘러싼 채로 수놓듯이 장식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이런 식으로 보인다.
밖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돌에는 십자가가 새겨진 흔적이 뚜렸했다.
한여름 땡볕이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교회부근에 자라는 나무가 드리워주는 그늘을 찾았다.
나무 그늘에서 우리는 아침겸 점심을 먹었다. 빵몇조각과 비스켓, 그리고 포도 한송이만 해도 배가 불러왔다. 다 먹지 못하고 남길 정도로 말이다.
나무 그늘 밑에는 육지 거북이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녀석은 역사속에서 소수 민족이 당하는 깊은 슬픔을 알기나 할까?
섬에서 북쪽을 보면 높은 산이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은 아라랏산으로 착각을 해서 숱한 여행기에 그렇게 기록을 해두었다. 높이 4058미터를 자랑하는 수프한 산이다.
호수 건너편, 그러니까 우리가 배를 타고 온 높은 산에도 늦가을이면 벌써 꼭대기 부근에는 눈에 �히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건너편에서 배가 오기 시작했다. 여기 물은 일반 바닷물보다 염도가 여섯배나 높다고 한다. 수영을 하면 느낌이 아주 매끄러워서 피부에 닿는 감촉 하나는 끝내주게 좋다지만 우린 수영을 하지 못했다. 준비를 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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