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 Redpath
먼저 음악 재생을 클릭하시고 보시지요. 그게 낫지 싶습니다
이왕 나들이를 한 김에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 한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역에서부터 학교까지 걸으면 30분이 걸렸습니다.
기차를 타고 학교가 있는 안동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한시간 이십분, 안동역에서 학교까지 다시 30분이 걸렸으니 학교 가는데만 두시간을 쓴 셈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루 네시간씩을 등하교 시간에 쏟아부은 것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나는 덩치가 작았기에 죽어라고 빨리 걸어도 효과가 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때 6번, 2학년때는 2번 3학년때 다시 6번을 했으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될 것입니다. 그때는 한반에 60명이 기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출석번호는 키 순서대로 정했었습니다.
입학시험을 보러 갔던 날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480명 정원이었는데 내 수험번호가 1005번이었습니다. 내 뒤로도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골동네 출신이어서 졸업생 120명 가운데 최상위권 두사람만 그 학교에 지원을 했으니 요즘 시골 중학교 학생들이 도회지 학교에 지원하는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다행하게도 두 사람 다 합격을 했습니다. 정식 합격자 발표가 있기 바로 전날 저녁에 라디오 방송국에서 합격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제 친구가 듣고는 미리 이야기를 해주어서 결과를 알았습니다.
"지금부터 @#중학교 합격자 번호를 발표하겠습니다. 3번, 5번, 9번...... "
그런 식으로 방송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너무 철이 없었던 나는 입학후 3월 말에 첫 학력고사를 치던 날에는 준비물로 가지고 오라고 한 국어사전을 가져가지 못해 국어시험을 망치기도 했습니다. 집에 국어사전이 없기도 했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치는 것으로 알고 다음 시간에 빌려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 정도로 순진했던 것이죠.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졸업을 앞두고 기차로 2시간 반정도 걸리는 먼 곳으로 이사를 가야했습니다. 그때 쓴 일기장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한창 추운 1월 중순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입학후 한 20일쯤 지난 뒤에 첫 시험을 공고했는데 시험 전날따라 예전 친구들이 너무 그리워서 같이 입학시험을 본 친구를 따라 가서 자고 왔었습니다. 친구집에서 자고 먹고 해가며 다음날 학교에 간 것이었습니다.
시험 결과는 60명 가운데서 28등 정도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중간 정도를 했으니 도시 출신 아이들이 정말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을 실감나게 느꼈었습니다. 학급 등수가 그 정도였으니 전교 등수는 까마득했었습니다.
슬며시 오기가 난 나는 공부하는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기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잘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기차 안에서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운산역에서 외우기 시작해서 안동역 도착할 때 쯤에는 다 외울 수가 있었습니다. 한 20여분 정도 걸렸던가 봅니다. 왜 그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4월말 고사를 치니까 학급에서 15등 정도를 했습니다. 슬슬 공부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로는 제가 다니던 그 학교가 그래도 대구를 제외한 경북 지방에서는 최고로 알아주던 학교였던 것 같습니다.
5월말에는 5등 정도를 했는데 영어를 가르치시던 우리 담임선생님께서는 덩치도 작고 어리바리한 나를 꽤 아껴주셨습니다. 그때쯤에 나는 내 짝으로부터 심한 괴로움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시골 촌놈이었던 내가 워낙 순진하고 물렁했기에 자주 찝적거렸던가 봅니다. 수업시간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후 3시 반경에 학교 수업이 끝나면 오후 6시경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하염없이 학교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본관 3층 꼭대기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대출받아 읽다가 도서관 문을 닫을 때면 반납을 하고 다시 학교를 배회하다가 기차역으로 가곤 했습니다. 시내가서 구경을 한다거나 돌아다닐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몸이 약했던 나는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까먹은 후 운동장 돌계단에 앉아 햇볕을 쪼이기를 좋아했습니다. 확성기로 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그냥 멍청하게 앉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음악이 좋기만 했습니다. 어딘가 마음 깊이 파고 드는 듯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느 방면에 어떤 재주를 가졌으며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해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도 부모님으로부터도 친구로부터도 그런 이야기는 거의 듣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얼간이 취급을 받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저 단순하게 학교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커서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할 줄 몰랐던 그런 멍청이가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6월말 고사에서 처음으로 학급에서 2등을 했습니다. 그게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았습니다. 크게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으레껏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정도로 대접받은 기억밖에 없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부끄러운 기억이 가득합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나이가 든 지금에도 여기에 쓰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1학기 마지막 시험에서 드디어 1등을 했습니다. 그날의 감격이 아직도 선하기만 합니다. 그때 받은 통지표를 아직도 다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해 방학 때는 줄기차게 놀고 일했던 기억뿐입니다. 이사간 동네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강에 가서 놀고 집에서 놀고 한번씩은 일하러 가고.....
2학기부터는 치열하게 수위다툼을 했습니다만 항상 내가 밀리기만 했습니다. 다른 모든 과목에서 차이를 벌려두어도 실기를 중요시하는 체육에서 60점대를 받았기에, 만점 가까운 점수를 받는 덩치큰 친구를 이겨내기가 어려웠습니다.
100점 만점에 실기를 80점을 주고 이론을 20점 정도 주었으니 이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체육을 뺀 총점을 따져보면 제가 앞서는 경우가 많았어도 그 한과목 때문에 항상 역전을 당하곤 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내 성적표를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거의 40년만에 중학교에 가서 옛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누가 옆에서 한마디만 더 해 주었더라면, 누가 곁에서 세상 넓은 것을 알려주고 특히 학문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더라면 제 인생이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보니 교회의 뾰족탑이 두개나 보였습니다. 그때는 있었을 리가 없었습니다.
다시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살아온 과정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크게 작용하셨다고 여겨집니다.
나는 천천히 학교 운동장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운동 신경이 아주 발달해서 공중회전까지도 쉽게 해내던 친구가 생각나기도 했고,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친구가 그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나는 너무 내성적이고 시골뜨기여서 친한 친구를 사귀고 만드는데는 실패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책보는 것이 좋았고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었습니다.
정말 오랫만에, 내가 자주 앉았던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습니다. 나는 외톨이로 혼자 노는데 익숙했습니다.
독일군 장교들 모자처럼 머리 위에 흰색테를 넣은 독특한 스타일의 모자를 살 돈이 없어서 흰 실로 흰색테를 흉내내어 집에서 어설프게 꿰매어 넣은 모자를 쓰고 다녔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참 바보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바보같은 모습으로 어리바리하게 살아왔습니다.
교정에는 내가 즐길 수밖에 없었던 조용한 외로움이 아직까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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