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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초등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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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8 조지아, 터키-두 믿음의 충돌(完

개들과 함께 춤을 4 - 차얻어 마시기

by 깜쌤 2008. 9. 29.

  

 영감님 한분이 허겁지겁 뛰어나오시더니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터키말을 모르는지라 우리말로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우리보고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왔다. 

"차이"

차나 한잔 들고 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도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사람들이 아닌가? 선뜻 따라 들어가기가 무엇해서 내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잠시 한번 더 기다렸다가 어르신이 한번 더 들어오라고 권하면 그때 못이기는 척하며 따라들어가자고 한 것이다. 우리가 선뜻 따라 들어가지 않자 영감님은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으셨다. 잠시 딴청을 부리는 척하는데 영감님이 우리 눈치를 보시더니 한번 더 권하시는 것이었다. 그제사 우리는 못이기는 척하고 영감님 뒤를 따라 갔다.

 

문지방 앞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서니 바닥 전체에 카펫을 깐 응접실이 나왔다. 집안 구조는 아주 단순한 것 같았다. 눈 목(目)자를 옆으로 눕힌 형태의 집이라고 여기면 되겠다. 가운데가 거실 겸 응접실이고 오른쪽은 부엌, 그 안쪽은 노인방이고 거실 왼쪽은 젊은 부부방 정도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영감님은 아이들을 모두 방으로 몰아넣으셨다. 예전 우리 시골집에 손님이 오신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정말이지 풍습이 아주 흡사했다.  

 

사진의 오른쪽을 보면 방으로 �겨 들어간 아이들 중에 조그만 한 아이가 문을 열고 우리를 엿보기 위해 슬며시 거실로 나오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며 향수(鄕愁)를 느꼈다. 내 어린 시절의 시골살이 모습과 같아도 너무 같은 것이다.

 

 

  

 

 

 영감님은 차를 가져 오도록 시켰다. 아이들은 모두 방으로 �겨 들어간 상태에서 며느리가 잔 세개를 가지고 오자 영감님은 며느리를 꾸중하는 것 같았다. 사람수를 보고 네개의 잔을 가지고 와야지 이게 뭐냐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들렸다. 나도 시골살이를 오래 해봐서 그 정도 눈치 정도는 긁어댈 줄 아는 사람이다.

 

시골도 그냥 시골이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양반동네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안동 부근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으므로 이런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바른 말이지만 안동출신만 그런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어디든지 조금 번듯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한 곳이면 의례껏 그런 식으로 처신하지 않았던가?    

 

뜨거운 물과 설탕인 든 통과 잔을 가지고 오자 영감님이 직접 잔을 헹구셨다. 그리고는 우리들 앞으로 한잔씩 돌리는 것이었다. 설탕은 우리가 알아서 넣으면 되었다. 말이 안통하니 잠시 어색한 기운이 흘렀지만 여행안내서를 꺼내서 뒤적거려가며 몇마디 어설픈 대화나마 이어 나갔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차가 아주 맛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감님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들은 쿠르드 사람들이었고 우리가 하는 말은 터키(=투르키에 민족)말이었던 것이다. 대강대강 뜻을 통하면서 짧은 대화나마 이어갈 수 있었다.  그동안에도 아이들은 우리를 흘깃흘깃 쳐다보았고 조금 나이가 든 딸아이들은 거실 한구석을 돌아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아이들이 조금 떠든다 싶으면 그때마다 영감님이 한마디 하셨다. 그러면 아이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지곤 했다.

 

"손님이 오셨는데 어디서 함부로 떠드는게야. 이런 막되먹은 상놈들 같으니라고." 뭐 그런 정도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거듭 거듭 아련한 향수를 느꼈다. 그렇다. 우리도 손님이 오시면 방 한구석에 꿇어앉은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고 말은 소곤소곤 조용하고 나직하게 해야 했으며 여자들은 밖으로 나가거나 다른 방으로 �겨나가야 했던 것이다. 

 

 

 

 

 

 차를 한잔 마시고 나자 영감님은 다시 한잔 더 권하셨다. 권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정의 발로 아니던가? 그러기에 우리 조상들은 술을 마실때도 권주가를 불렀다.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내가 처음 총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을때 회식자리에서 권주가를 불러 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권주가까지 불러 주시며 술 한잔 권하는데 안먹고 배길 사람이 어디 있으랴.

 

요즘은 너무 권해서 탈이다. 특히 남자들 술자리에서는 그런 현상이 심하다. 술을 안마시겠다는데도 악착같이 권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심지어는 술을 옷에 쏟아붓기도 하고 강제로 입에 부어주기까지 하니 어지간한 사람은 견딜 재간이 없는 것이다.

 

두잔을 마시고 나서 사양하자 영감님은 차 권하기를 그만 두셨다. 나는 여기에서 손님접대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자기집 문앞에 어른거리는 얼굴도 익지 않은 나그네를 초청하여 따뜻한 차 한잔을 대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아니던가? 도시에서의 각박한 모둠살이에 지치고 찌든 현대인들이 얼굴 모르는 사람을 집안으로 끌여들어 아무런 부담없이 남에게 차한잔 대접하기가 그리 쉬운 일일까?

 

 

우리는 적당한 순간을 봐서 일어서야만 했다. 무엇하나 작은 선물이나마 주고 싶은데 드릴 것이 없어서 비상식량으로 사놓았던 과자와 초콜렛을 꺼내 모아서 아이들에게 주기로 했다. 영감님께 드리면 안받을 것이 뻔하므로 손자 손녀들에게 주는 것이 제일 확실한 법이다. 모아서 내가 대표로 아이들 방에 가서 재봉틀 부근에 놓아두고 나왔다. 영감님은 한사코 손사래를 치셨고....... 그러면서 나는 은근슬쩍 아이들 방을 훑어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나갈때 아이들도 따라 나와서 인사를 했다. 아이들의 모습이 순박하기 짝이 없었다. 여행에서의 묘미는 바로 이런 순간이다. 낯모르는 사람의 작은 친절이 여행지의 인상을 결정짓는 법이다. 쿠르드 민조그이 순박함이 마음속 깊이 파고 들었다.

 

마당 한구석에 화장실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때의 시골집 화장실 위치와 어찌 이리도 똑같은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시골은 가마니떼기로 앞을 가렸던 집이 많았었는데 여기는 앞이 휑하니 열려있었다.   

 

 

 

 

 우리가 들어갔다가 나온 영감님 집이다. 집은 초라했지만 사람들은 인정이 넘치는 것 같았다.

 

 

 

 

 이웃집의 모습이다. 집 모양은 서로 비슷했다. 가난에 찌든 힘겨운 삶이지만 가족가간의 사랑과 형제간의 우애와 인정 하나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갈아 엎어놓은 땅이 제법 비옥해 보였다. 땅에는 보기보다 돌이 많았다. 이 마을에서는 개에게 크게 시달리지 않았다. 시달리지도 않았을뿐만 아니라 차까지 대접받지 않았던가?

 

 

 

 

 

 마을 곁을 흐르는 개울을 건넜다. 물없는 개울 말이다.

 

 

 

 우리는 다시 산으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 부지런히 걸어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삭 파샤까지 가려면 정말 부지런하게 걸어야 했다. 산으로 올라가자 밀밭이 나타났다.

 

 

 

 

 밑으로 동네가 보였다. 메마른 산을 넘어가는 구름 그림자가 우리들 곁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저멀리 날아가는 구름 그림자가 마을을 덮으며 지나갔다.

 

  

 

 

 기로수가 하나도 없으니 구름 그림자조차도 그립기만 했다. 

 

 

 

 

 마을 뒷산을 휘감아 올라간 도로를 따라 걷는 우리가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마을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저 산너머로는 이란 국경이 되지 싶다.

 

 

 

 

 이 산줄기들의 끝은 어디쯤일까?

 

 

 

 

 우리는 동네 뒷산 길가의 작은 바위에 앉아 아까 영감님 집에서 지어주고 남은 초콜렛을 씹었다. 저 멀리 우리가 걸어온 길들이 가느다란 노끈처럼 산에 걸쳐져 있었다.

 

 

 

 

 도로 아래 저 밑 골짜기에는 작은 푸르름이 조금 묻었다. 군데군데 건초더미들이 대지의 흉터처럼 자국을 남기고 있었고......

 

 

 

 

 산비탈엔 양과 염소떼들이 먹이를 찾아 지나간 자잘한 흔적이 누비옷의 바늘자국처럼 오밀조밀하게 얽혀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하염없이 땡볕 밑을 걸어 산을 올라야 했다.

 

 

 

 

바싹 마른 대지위엔 먼지가 폴폴 날렸다. 이젠 마을이 제법 작게 보였다.

 

 

 

 

 참 멀리서부터 걸어왔다.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이 얼마나 남아있는지조차 모르고 걸어야한다.

 

 

 

 

 

 부드러운 산등성이에는 밀밭이 군데군데 노란 무늬를 그렸다.

 

 

 

 

 드디어 고개마루에 올라섰다. 여기가 정상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가 걸어가야할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산꼭대기에 오르자 도리어 아까보다 더 진한 푸르름이 산을 뒤덮고 있었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길가로 펼쳐진 밀밭이 부드러운 담요처럼 보였다.

 

 

 

 

 갑자기 밀서리 보리서리 해먹고 다녔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여기 풍경이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가고 또 가고......

 

 

 

 

 걷고 또 걷고...... 심심하면 줄서서 걷기도 하고.......  그냥 와아 가기도 하고......

 

 

 

 

 

 전봇대는 있는데 전선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전선을 끊어가서 엿이라도 바꿔먹은 것일까? 우리가 가난할 때  전선까지 끊어가서 팔아먹은 사람들이 있었다. 참으로  개념없는 인간들이 득시글 거릴때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산비탈에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밀밭 너머로 뭉게구름이 몽실몽실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밀밭으로는 바람이 스쳐 지나갔고...... 그때마다 밀이삭들이 보드라우면서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혹시 건초용으로 기르는 사료작물이 아닐까?

 

 

 

 

 길 좌우로 곡식들이 그득했다. 정말 그득그득했다.

 

 

 

 

 우리는 줄기차게 걸었다. 지겹도록 걸었다.

 

 

 

 

 막 걸었다. 마구 걸었다. 감자밭 옆으로도 걷고 감자밭을 옆구리에 끼고도 걷고 그냥 스치면서도 또 걸었다.

 

 

 

 

 그렇게 걸어도 끝이 안 보였다. 그렇게 그렇게......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