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라는 용어를 처음 들어본 분들도 많지 싶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므로 못들어본 분보다는 한번이라도 접해보신 분들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경 66권의 제일 앞부분에 자리잡은 창세기에 기원을 둔 이야기이다. 이 창세기 이야기만큼 논란의 대상이 되는 책은 거의 없지 싶다.
창세기 속에 등장하는 내용 중에서 논란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주제만 해도 부지기수여서 말로 다 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생각나는대로 대강 손으로 꼽아보아도 엄청나다.
1.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심 - 우주의 생성과정 및 진화론과의 충돌
2.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 - 인류의 기원문제
3. 선악과와 원죄
4. 에덴 동산의 위치
5. 대홍수 이전 인간들의 장수(長壽) - 성경 기록의 정확성과 사실성 문제
6. 노아의 대홍수
7. 에덴 동산에 스며든 영적인 존재의 실체
8. 하나님의 본질
9. 대홍수 이후 문명 확산 경로와 전파
10. 대홍수 이전 문명의 실체
이야기가 엄청 광범위하게 확산된 모양새가 되었지만 얼핏 손가락으로 꼽아보아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주제는 너무 많아서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핵심은 단 한가지로 귀결된다. 그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여부에 직결되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절대자이신 창조주의 존재여부에 관한 개인의 견해는 단 두가지로 끝난다.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좀 더 공손한 표현을 하자면 '계신다는 것'과 '안계신다는 것'이다.
바로 위의 사진을 유심히 보기 바란다. 어떤 모습 같은가? 감이 잘 안오는 분들은 아래 사진을 보기 바란다.
이제는 감(感)이 잡혔지 싶다. 위의 사진에서 양쪽 옆의 나뭇가지를 제거하고 조금 다른 각도에서 잡아본 사진이다. 산꼭대기에 바위가 줄을 서있는 곳이 터키와 이란의 국경이다. 점선을 친 곳이 있는 그 부근이 누훈게미인데 엄청난 논란의 장소가 되어 있는 바로 그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 이 장소의 모습과 위치를 두고 노아의 대홍수와 연관지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솔직한 말이지만 노아의 대홍수 이야기도 성경 속에 등장하는 종교설화나 전설 혹은 특정 집단의 자기 도취나 세뇌를 위한 꾸며낸 이야기로 치부해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위에서 절대자의 존재 유뮤에 대해 인간은 두종류로 나누어 반응하게 된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 신의 존재에 대해 '없다'라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분들은 그냥 여행기로 생각하고 읽어나가면 된다.
노아의 방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를 원하는 분들은 다음 글 목록을 클릭해 보시기 바란다.
타이타닉 13 | 0 | 0 | 2006.0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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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의 현장 - 아라랏 산 부근 풍경 | 6 | 0 | 2006.02.13 |
노아 방주의 도착지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존재한다. 방주의 위치를 찾아다니던 프랑스 탐험대에게 누훈게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 쿠르드인인 하산 할아버지는 순식간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사진 속의 장소가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바로 그 장소인지의 사실 여부와, 배처럼 보이는 저 지형이 방주의 흔적인지 아닌지 그 진실에 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실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나 학설을 보면 아라랏 정상 부근의 빙하 아래에 방주가 묻혀있다는 주장에서부터 아라랏의 다른 장소에 묻혀있다는 온갖 주장을 위시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산이 아라랏산이 아니라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주장과 학설이 난무하고 있으므로 진실을 알아내기는 정말 어려운 것 처럼 보인다. 심지어는 회교 경전인 코란에서 방주가 다른 곳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경의 기록이 엉터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몰고 가기도 한다.
코란의 기록을 근거로 삼아 성경 기록이 엉터리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반론은 나름대로 확실한 논리를 가진다. 모세가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지금부터 약 3500여년 전이지만 코란의 기록은 지금부터 약 1300여년 전의 기록이므로 이 둘 사이에는 너무도 많은 연대기상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기록된 연대가 전부는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맞는 이야기다. 기록물은 얼마나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얼마나 진실하게 기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므로 충분히 말이 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 깜쌤이란 작자가 지금부터 2100여년 전에 벌어졌던 사건인 고조선의 멸망(BC 108년)에 관해 기존 주장과 학설을 무시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기록해 나갔다고 치자.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쓴 기록에 대해 코웃음을 칠게 뻔하다. 그런 자료는 어디에서 구했느냐, 무엇을 근거로 썼느냐 하는 식으로 비판이 쏟아질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라랏의 위치가 여기가 아니고 다른 곳이라고 주장하는 일부의 기록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그 일부분을 대표하는 기록이 코란인데 코란이 기록된 연대는 아무리 늘려잡아도 지금부터 1300여넌 전의 일이다. 우리나라 역사로 비교하자면 백제의 멸망시기 직전의 일인 것이다. 모세의 기록보다 약 2200여년 정도 뒤에 기록된 코란에 의해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은 아라랏이 아니고 다른 곳이라고 한다면 이는 논리상으로도 심각한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터키 정부에서 공식적인 발표가 없는 것으로 보아 방주 이야기는 엉터리적인 요소가 너무나 많이 섞인 가공의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다른 입장에서 보면 그런 판단은 현실을 너무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다 아시다시피 터키는 회교국가이다. 인구의 거의 절대 대다수가 무슬림으로서 이슬람을 믿는 국가이다.
적어도 종교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코란 속의 내용과 성경 속의 이야기 내용이 심각한 대립을 보이는 곳이 부지기수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노아의 방주가 실재로 존재하며 그 위치가 아라랏산 어디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이슬람 국가로서의 위치와 회교의 실체가 흔들리는 마당에, 객관적이고도 공정하게 조사와 발굴 및 탐사작업이 이루어져 양심적인 연구결과가 발표될 것으로 믿는다면 너무 순진한 것이다.
불교 혹은 기독교 국가안에서 회교(이슬람)을 포함한 다른 종교의 선교는 허락될 수 있지만 이슬람 국가 안에서 다른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라오스나 미얀마 같은 곳에서조차 기독교 선교사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정도로만 하자. 종교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기 때문에 글쓰기가 아주 조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누훈게미라는 장소가 방주의 도착 장소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관한 판단 여부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맡겨둔다. 알아서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궁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박물관 겸 기념관을 떠나 그 장소에 직접 가보기로 했다. 언덕을 살살 내려가보았다. 미끄러지면 정말 곤란하니까.....
엉겅퀴 가시가 보기보다는 아주 날카롭기에 찔리면 엄청난 고통이 따라온다. 그러므로 특별히 조심해야 했다.
예전 어느 한때는 누훈 게미에 접근할 경우 이란 쪽에서 총알이 날아오기도 했었던 모양이다. 이젠 언덕을 거의 다 내려왔다.
바로 저 앞이다. 배 옆구리 끝이라고 생각되는 바로 그 앞에는 깊은 도랑이 있다.
이런 도랑을 건너서 올라가면 배모양의 터가 나온다. 우리는 지금 사진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건너가려고 하는 중이다.
내가 먼저 도랑을 건너가서 방주터에 올라갔다. 우리 팀 멤버가 내 뒤를 따라서 건너왔다.
방주터의 다른 옆쪽 끝이다. 앞뒤 끝이 아니고..... 앞뒤로 좀더 길게 찍어보면 아래의 사진과 같이 보일 것이다.
사진의 위가 배모양 터의 위쪽이 된다.
이게 진짜 방주라면 우리들은 배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 된다. 참 기묘한 장소이다. 여기 지형이 우연의 일치로 배모양이 되어버린 것인지 혹은 방주를 덮은 흙 속에 실제 잣나무 성분이 들어있는 토양인지 조사해 보면 알 것 같기도 하지만 터키 정부에서는 노아의 방주터라는 사실을 부인했었다고 한다. 물론 무엇이 진실인지 나도 모른다.
배모양 터 안에서 산 정상 쪽을 본 모습이다.
뱃머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앉아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여기에서 산 아래쪽을 보면 이란으로 가는 도로가 보이고 그 너머로 아라랏 산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바로 아래 사진처럼 말이다.
저 건너 편에 보이는 산이 아라랏 산이다. 오른쪽 골짜기를 따라 계속 가면 이란 국경을 넘게 될 것이다. 큰 봉우리와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라랏인데 지금은 산 정상부에 구름이 걸려서 구별하기가 조금 힘들다. 그렇다면 다음 사진을 보기로 하자.
2001년에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다. 필름사진을 스캐닝 한 것이다. 큰 봉우리와 작은 봉우리가 뚜렸이 나타나 있다. 이 장소에서 하산 할아버지의 기념관을 보면 아래 사진처럼 보인다.
우리는 나무로 둘러쌓인 저 기념관에서 비탈을 내려와서 지금 이 장소에 있는 것이다.
기념관에서 언덕배기를 조금 오르면 위젠길리 마을이 보인다. 정말 순박하고 가난한 쿠르드 사람들이 사는 동네다. 우리가 노훈게미에서 왔다갔다하자 마을에서 아이들 몇몇이서 우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을 저 뒤편 국경을 이루는 곳에 감시탑이 보였다.
한참을 쉰 우리들은 여기를 벗어나기로 했다. 많은 수수께끼와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가슴속에 간직하기로 하고......
인적이 없는 마을쪽 뒤편으로 구름이 피어 올랐다.
하염없이 앉아서 결론 안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 보다는 다음 일정을 추진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총각 한사람은 무엇을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는지 아직도 방주터에 앉아서 버텨내고 있었다.
방주터를 지나서 위젠길리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마을에서 우리를 보고 �아온 아이들 몇이가 우리를 보고 "파라, 파라"라고 외치며 손을 내밀었다. 돈을 달라는 이야기다.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해서 돈을 주면 큰일나는 수가 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모두 다 몰려나와서 둘러싸이는 비극을 당하기 쉬우므로 절대 주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 도랑을 건너다 말고 나는 다시 돌아서서 사진기의 셔터를 눌렀다.
이젠 여기에 다시 올 일이 없지 싶다.
이란 쪽 하늘로 구름이 떠갔다. 인간들이 땅위에 마음대로 그어놓은 국경선이라는 것이 참으로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그 금 때문에 여기 쿠르디스탄(쿠르드스탄)에 사는 쿠르드 사람들은 마음놓고 친척을 찾아가기도 어려운 것이다. 자기들 땅이면서도 갈라져 살아야 하고 거기다가 국경이라는 것을 넘을 때마다 여권을 내밀고 스탬프를 받아야 하는 가련한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새들이, 여기 사는 토끼들이, 숱하게 많은 짐승들이 자기들끼리 여권을 만들어서 허가를 받고 넘나들던가?
우리들은 위젠길리 마을로 들어섰다. 여기가 오늘의 두번째 목적지이다. 사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트래킹이 시작되는 것이다.
산에는 야생화들이 가득했다.
마을 사람들이 널어놓은 빨래들이 풀밭에 널려 있었고.....
방주터라고 전해지는 몇군데의 장소 가운데 하나인 노훈게미에 따가운 여름 햇살이 사정없이 퍼부어지면서 이런 저런 모습으로 전해오는 홍수 이야기를 점점 퇴색시켜 갔다.
마을에는 한적함과 권태로움이 따가운 햇살아래 졸고 있었고.....
구름들은 시덥잖은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한가로이 넘나들고 있었다.
어리
버리
'배낭여행기 > 08 조지아, 터키-두 믿음의 충돌(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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