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1 진외가 : 아버지의 외가
작은 고개 마루턱에는 야생화들이 그득했다. 거기까지 오르면 이젠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져야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를 못했다. 아직까지 더 올라가야 할 산이 저 앞에 우뚝 솟았기 때문이었다. 저 밑에 돌로 된 올망졸망한 집들이 보이고 그 중에 한채 속에는 아까 우리가 만난 마음씨 좋아보이는 터키 영감님이 마누라 잔소리를 들어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사진 밑에 파란색 네모테가 불쑥 나타나고 그 속에 생소한 문장이 나타나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겠다. 나는 처음에 이 여행기를 쓸 때 이 부분에 와서는 고민을 많이 했다. 그냥 산에 올라갔다 왔다라고만 하면 될 것이지만 그렇게만 쓰려니 이 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사진없이 문장으로만 쓰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원래 내가 뜻한 바가 무색해지고 만다. 그렇다고 어설픈 사진만 좌악 늘어놓는 것도 너무 무성의한 짓이라고 여겨지기에 나름대로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원래 내 방식대로 살아온 사람이다. 속된 말로 하자면 "내 멋대로 살아온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도 내 방식대로 쓸 생각이다. 어차피 사이버 공간에 연재되는 인터넷 글이라고 하는 것이 보고 싶은 사람만 보는 것 아니던가?
나는 광활하고 웅장한 대자연속에 드러난 경치와 그 속에 담그어진 내 자신을 보며 나의 천박한 속물 근성을 생각해보았다. 결국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부끄러움! 맞다. 내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끄러움! 그래서 결국 나는 꼭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언젠가 읽어보았던 <부끄러움>이라는 수필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인간은 자기 속마음을 들켰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남에게 보이면 곤란한 것을 보였을 때나 속마음을 들켰을 때, 혹은 그도 저도 아니라면 내 처지가 남보다 못할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법이리라. 나는 내 부끄러움을 들꽃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에 씻어서 멀리 보내버리고 싶었다. 내 속마음을 정갈하게 씻어서 새것으로 갈아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저기 무리짓기도 하고 한곳에 떼거리로 모여들어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자 하는 야생화들과 작은 풀벌레들의 속마음에도 부끄러움이 가득 묻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부끄러움>이라는 글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여름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살 아래인, 열 세살 되는 누이뻘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례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2 통내외 : 두 집 사이에 남녀가 내외 없이 지냄
3 절척 : 성과 본이 같지 아니하면서 가까운 친척.
저 아래 동네에도 그런 소년과 소녀가 살까? 그럴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실제로 나는 하산길에 그런 스타일의 소녀를 하나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저 산 아래에서......
소녀의 몸매며 옷매무새는 제법 색시꼴이 박히어 가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시골서 좀 범절있다는 가정에서는 열 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 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4 침선 : 바느질과 반찬 만드는 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집 문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꾼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너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대접을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너방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냈다.
우리도 이젠 멀리까지 올라왔다. 동네가 저 아래에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치를 닮은 이 녀석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확실히 여치는 아니다. 여치든 아니든 간에 이런 식으로 해바라기를 하는 것이라면 너무 조심성이 없는 것이다. 여기 곤충들은 사람 겁을 내지 않았다. 그냥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리라.
바위에 묻은 이런 식물은 지의류일 것이다. 지의류가 바위 같은 것에서 사라진다는 말은 환경오염이 되기 시작했다는 말이고 이런 지의류가 살아있다면 아직은 오염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데 여기 바위에서 만나게 되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말이다.
사실 말이지 여기처럼 공기가 맑은 곳을 터키안에서 찾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다. 우린 모처럼 깨끗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켰다. 맑은 공기를 마셔 술취하는 현상을 나타낸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너무 취해서 걸을 수조차 없었으리라.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배기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아있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 편 모서리에 걸린 분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약간 묻은 소녀의 분홍적삼이.
6 남창 : 남쪽으로 난 창문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7 너스레 : 수다스럽게 떠벌려 늘어놓는 말이나 짓.
끝.
윤오영님의 수필 <부끄러움>이었다. 그 분은 서울 태생으로 보성 고등학교에서 20여년간 교편을 잡으셨던 어른으로서 1907년에 태어나셔서 1976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14살 때의 이야기라면 1920년 초반의 일이니 격세지감이 묻어나는 시절의 사건인 셈이다.
이제 우리들은 어느 정도 올라온 셈이다. 밑에서는 산봉우리 위의 모습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기에 호수의 위치조차 짐작을 할 수 없었지만 이젠 대강 짐작이 되었다. 오른쪽 제일 위 바위 언덕 너머 아니면 그 아래 바위 언덕배기에 호수가 있을 것이다. 바위산 한켠에는 아직 덜 녹은 빙하가 희끄무리하게 묻어 있었다. 빙하가 있는 곳에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면 아직도 한참이나 더 올라가야 한다.
산에는 별별 종류의 야생화들이 다 자라고 있었다.
여기에서 보는 하늘은 높기만 했고 산들은 첩첩이 겹쳐져 있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이 골짜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아득해졌다.
산중호수에서 흘러내리는 것으로 짐작되는 물이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저 벼랑을 올라가야만 호수를 볼 수 있으리라.
뒤쪽엔 야생화 꽃밭이 펼쳐졌다. 정말이지 이건 꽃밭이었다. 하지만 말이다, 여기에서부터 우리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명문대를 다니는 총각이 아까부터 힘들어하더니 이젠 점점 더 심하게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고산병 증세거나 아니면 몸이 아픈 것이리라.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형님과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얼마남았는지 모르는 상항에서 데리고 간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올라가는 것은 어떻게 해본다쳐도 나중에 내려가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될게 뻔했다.
결국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해야 했다.
끝까지 데리고 올라가느냐.......
아니면 모두 다 함께 내려가느냐.......
아니면 혼자만 이 산중에 남겨두고 남은 사람들만 올라 가느냐.......
우리의 목적지는 저 언덕 너머 바위산 골짜기 그 어디메쯤이 될 것이다.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계산조차 명확하게 해낼 길이 없는 처지다. 산봉우리에서는 차가운 물기를 가득 머금은 짙은 구름이 마구 솟아 올랐다.
모두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결국 우리가 내렸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었을 것 같은가?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결심한 것을 말해야만 했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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