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 중에서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사나이가 말을 걸어왔다.
"바르할?"
"그렇소!"
"나는 카라한 소속이오. 세시 반에 갑니다. 35리라!"
핵심만 찍어서 말하는 그런 짧은 대화이다. 물론 영어 실력때문임은 알지만 무엇인가 찜찜하다. 론리 플래닛에서는 2시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린 두시 차를 원하고 있소."
오후 2시에 출발한다고 해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4시가 될 판인데 3시 반이라면 어쩐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우리 몸이 너무 피곤하다. 배낭여행안내서에 보면 바르할에 있다는 숙소는 달랑 3개 정도뿐이다. 바르할 판시욘, 마르시스 빌리지 하우스, 그리고 카라한 펜션 정도만 소개되어 있는데 늦게 올라가서 숙소가 다 차버리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바로 그때 아주 묵직한, 그러면서 약간 코가 막힌듯한 목소리를 지닌 잘 생긴 젊은이가 말을 걸어왔다.
"저는 아흐멧이라고 합니다. 제가 가진 차는 오후 2시에 갑니다. 요금은 40리라요. 저분은 저의 아저씨입니다. 두시에는 확실히 가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두시에 출발한다는 차를 찍게 된 것이다.
"지금 운전하시는 아저씨가 아파서 잠시 의원에 갔습니다만 어쨌거나 두시에는 출발할 것입니다."
바르할은 인구 1000여명의 아주 작은 마을이다. 그러니 모두가 아저씨이고 아주머니일 것이다. 꼭 자기 친삼촌이 아니더라도 모두 삼촌일 것이며 사촌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게 이해는 된다. 두시에 출발한다면 이제 45분 정도 남았다. 이젠 무엇이라도 조금 먹어두어야 했다. 두시간 정도 걸린다고 소개되어 있으니 배고픈 상태로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조금이라도 배를 채우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멀미도 안할 것이다.
유수펠리는 해발고도 650미터 정도에 위치한 인구 7천여명의 작은 도시이다. 마을 구조도 아주 단순하다. 그냥 도로 한두개를 따라 이루어진 마을이므로 단순할 수밖에 없다. 4000미터 급의 산이 사방에 즐비하므로 눈녹은 물이 상류에서 흘러내려 골짜기를 따라 큰 물살을 이루며 달리는 강줄기를 끼고 있다. 이 마을의 운명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자.
버스 터미널 부근에는 작은 가게들과 잡화점 등이 자리잡고 있다. 터미널이라고 해도 우리나라의 작은 읍 정도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을 상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우리나라 시골에는 도시로 많은 주민들이 떠나버려서 사람보기가 어렵지만 터키에는 아직도 시골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므로 산골짜기 마을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다. 사람들이 많으니 미니버스들이 골짜기마다 다니는 것이 당연하다. 그 중에 하나를 우리가 타야하는 것이다.
아교질 비슷한 물질 속에 땅콩이나 호두알을 박아넣은 간식꺼리를 사고 포도를 두송이 정도 사서는 점심대용으로 먹었다. 설탕덩어리처럼 달콤한 청포도는 2킬로그램에 2000원 정도 했다. 작은 수퍼의 주인은 이것의 이름을 쿠멕 정도로 발음했는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도 드러나지를 않는다.
이윽고 두시가 되자 자동차는 출발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차는 카라한 펜션에서 운영하는 개인적인 차였는데 우리는 돌무쉬로 착각을 했던 것이다. 유수펠리에서 물이 흐러내리는 상류쪽으로 차가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양쪽으로 병풍처럼 둘러 서있는 산악지대의 모습은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강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에는 물이 풍부해서 그런지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물가에 심은 나무'라는 표현이 이해되었다. 산에 나무가 드물어서 도저히 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흘러내릴 정도이니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골짜기 여기저기에 망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곳이라면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골짜기 입구나 좁은 곳을 골라 차단하면 적의 침입로는 완전히 봉쇄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물이 풍부하니 지구전을 벌이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것 같다. 문제는 계곡 속에 얼마나 넓은 평지나 농경지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런 의문은 나중에 다 풀리게 된다.
젊은 청년 아흐멧은 아주 조심해서 운전을 했다. 천천히 골짜기를 오르기 시작했는데 과속을 하면 위험할 수밖에 없는 길이기도 했다. 그는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러니 아직은 젊디 젊은 총각인 것이다. 골짜기로 좁게 난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성채가 나타나면 차를 세워주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아흐멧이 운전하는 차량의 유리창이 너무 진한 색으로 선팅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안에서 차창 밖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다가 내부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옥의 티이다.
제일 앞자리, 그러니까 운전석 옆자리에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두텁다는 느낌이 드는 양복을 입은 회색머리의 젊잖은 신사가 타고 있었는데 그는 영어와 터키어 모두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했다.
아무리봐도 학자풍의 사람이다. 영국사람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터키계 영국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뒷자리 구석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 양반과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지만 영어를 하는 것은 들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도대체 이 골짜기 안에는 무엇이 있길래 여행안내서에서 '천국'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과 궁금증이 샘솟기 시작했다. 산높이로만 본다면 유럽 알프스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곳은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지만 입구 모습으로만 보면 메마르고 황량한 곳이 되어야 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미니버스는 산굽이를 감돌아 조금씩 고도를 올려가기만 했다. 몇개의 작은 마을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고......
그러다가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에 차가 잠시 맘추었는데 영국 신사와 아흐멧은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린 그동안 잠시 내려서 마을을 살펴보았다. 도로 옆에는 산골짜기 초등학교라고 생각되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방학중이어서 그런지 아이들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모스크가 한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긴 원래 기독교지역이었지만 이제 기독교는 교회 흔적만 몇개 남기고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회교도 거주 지역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계속 위로 올라갈 것이다.
도로 밑에 자리잡은 집에는 소녀가 고개를 내어 밀다가 우리가 카메라를 꺼내자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소녀는 사라지고 대신 사내아이가 나와서 우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산골 마을엔 고요함이 내려앉아 뜨거운 오후 햇볕에 졸고 있었다.
말을 탄 이 사나이는 케말 파샤일 것이다.
젊은 여자와 인사를 나누는 이가 아흐멧이다. 내 느낌으로는 그의 누님이 아닐까 싶다.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은 자기 직업을 요리사라고 우리에게 소개를 했었다. 우리와 같은 차를 타고 올라갔는데 매너가 좋았다. 아마 바르할 부근의 마을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것 같았다.
다시 출발한 차는 비포장 도로를 지나기도 했다. 작은 폭포 앞에 서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주었다.
드디어 골짜기가 좁아지면서 개울 폭도 조금 작아지고 물의 양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제 다 온 것이리라. 다시 작은 마을 하나를 더 지나서 2킬로미터쯤 올라가서 드디어 멈추었다.
계곡 양쪽이 바짝 다가서서 도저히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차를 멈추더니 내리라고 한다.
그리고는 우리 배낭을 와이어에 매단 나무 상자 속에 싣더니만 막대기로 상자부근을 탁탁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배낭은 공중으로 떠서 알지도 못할 곳으로 끌려 올라갔고 우리도 산비탈에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야만 했던 것이다. 시계를 보니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데 모두 한시간 반 이상이나 걸렸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