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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라안 여기저기 in Korea

옛날 예배당의 흔적을 찾아서 1

by 깜쌤 2008. 8. 2.

 

가볼 곳은 많다. 그러나 시간과 돈이 문제가 되므로 움직일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교회 청년들이 수련회를 떠난 곳이 교회사적(敎會史的)으로나 문화재적인 측면에서나 제법 큰 가치를 지닌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 귀가 솔깃해져서 한번 가볼 마음이 생겼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청년들이 수련회를 떠났으니 한번 찾아가 봐야 하는 것이 도리이다.

 

위문 겸 답사를 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오후 5시경에는 출발하기로 했다. 목적지는 영천시 화북면 자천교회이다. 한시간 거리이니까 큰 부담없이 다녀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 음악활동을 같이하던 분과 함께 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경주에서 영천으로 가는 방법은 빤하다. 새로 왕복 4차선으로 확장 포장된 국도를 따라 가도 되고 고속도로를 따라 가도 된다. 하지만 영천까지만 갈 경우에는 고속도로를 사용할 일이 없다. 통행료까지 내어 가면서 달려야 할 정도의 실익(實益)이 없기 때문이다.

 

경주에서 현곡까지 지방도를 사용하여 간 뒤 영천국립묘지 앞쪽을 지나서 마주치는 영천-포항간 국도를 따라 가도 되니까 아무 길이나 선택하면 되었다. 우리는 경주-영천간 국도를 사용하기로 했다.

 

 

 

 

 

 영천시내로 들어가서는 청송 방향으로 나아갔다.

 

 

 

 

 청송쪽으로 방향을 틀어잡고 올라가면 화남면과 화북면을 지나게 된다. 우리가 목적지로 삼는 자천교회는 화북면 소재지에 있었다. 여기서는 보현산 천문대가 가깝다. 여기는 상류쪽에 오염원이 없으니 물도 맑고 깨끗하다. 하지만 경상북도 북부 지방을 감아 흐르는 낙동강 줄기의 하나인 내성천에서 볼 수 있는 모래밭을 보는 것은 힘이 든다. 아니 여기서는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자천초등학교 뒷쪽에 자천교회가 자리를 잡았다. 시골교회라고 해도 요즘은 어지간하면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예전의 정취는 찾을 길이 없지만 여긴 아직도 흙담으로 울타리를 친 담장속에 회칠을 한 벽을 가진 교회가 아담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나무로 만든 종탑을 보기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새벽에 종을 치는 것도 소음공해라고 해서 항의가 들어오기 때문에 차임벨도 마음대로 울리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니 교회 종탑에 매달린 종을 치는 것도 이제는 귀한 추억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황토로 토대를 만들고 중간 중간에 돌을 넣고 쌓아올린 담이야말로 시골 정취를 물씬 풍겨준다. 여기에 호박 넝쿨이라도 올리면 제격이지만 여긴 교회니까 깔끔하게 놓아 두는 것이 낫지 싶다.

 

 

 

 

 

 1903년 4월 1일에 건립되었다면 지금부터 105년 전의 일이니까 역사가 꽤 깊은 편이 들어간다. 요즘이야 도로가 사통팔달하여 어디에나 자동차가 마구 들어가는 시대여서 이런 산골짜기에도 쉽게 가볼 수 있는 것이지만 예전에야 어디 가볼 엄두라도 낼 수 있었던가? 100여년 전, 이런 산골짜기에 교회를 만든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도 외국인 선교사가.......   

 

 

 

 

 

 내부 모습이야 조금 있다가 보기로 하고 일단 안내문부터 읽어 두었다. 100여년 전에 지어진 교회이니까 유고 사상에 입각하여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의 원칙을 고수하는 의미에서 내부를 양분하여 만들었다는게 흥미를 끌었다.

 

 

 

 

 

 

 건물 출입문은 두군데에 있다. 측면에 한군데 정면에 두군데 이렇게 문을 내두었다. 예배당(禮拜堂)이라는 현판을 달아둔 문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예배당이라! 참 오랫만에 듣는 낱말임에 틀림없다.

 

 

 

 

 문 앞에는 댓돌이 단정하게 놓여져 있지만 예전 댓돌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옛날 댓돌은 다듬어서 쓴다고는 했지만 요즘 돌들처럼 싹둑 잘라낸 그런 돌은 드물었고 막돌 비슷한 모습의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종을 매단 종각도 예전 모습이 아니다. 예전 종각은 구불구불한 나무로 만든 것이 보통이었다.

 

 

 

 

 옆문을 열고 들어서자 긴의자를 놓은 내부 공간이 나타났다. 앞에 강대상이 보이고 오른쪽 나무벽 너머로 다시 의자를 놓은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내부는 일자(一字)형 공간으로 되어 있다. 

 

 

 

 

 

 중앙에 대들보를 받치는 기둥을 세우고 그 두개의 기둥 사이를 연결하여 칸막이로 구별했다. 보통 전면을 보고 왼쪽에 남자 성도들이 앉고 오른쪽으로 여자 성도들이 앉았던 것 같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한옥 기와집으로 된 예배당 건평만 25평 정도의 규모가 된다는데 이런 건물을 1904년에 지었다니 당시로 봐서는 대단히 앞서가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예전에는 교회에 의자가 없었다. 채워서 앉는다면 200여명까지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인원수 계산에는 상당히 어두운 내가 봐도 양쪽에 50여명씩은 거뜬히 앉을 수 있을 것 같다.

 

 

 

 

 

 의자가 놓여진 제일 뒤쪽에는 위로 들수 있도록 되어 있는 문이 있었다. 그러니까 마루바닥 뒷쪽으로 작은 방이 있었다는 말인데 그 공간은 일년에 두번 정도씩 들르는 외국인 선교사를 위한 방이었다고 한다.

 

 

 

 

 

 설교를 하는 곳에서 보면 전체의 모습이 보일 것이지만 함부로 들어가기가 무엇해서 구석에서 찍어본 사진이다. 젊은 청년이 들어오는 곳이 예배당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아래의 출입문이 있는 곳이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성악가로 경주 포항 인근에서 유명한 김##씨이다.

 

 

 

 

 대들보와 서까래의 모습이 선명하다. 껍질을 벗기고 대패로 손을 본 나무들이 반들반들하게 윤을 내고 있었다.

 

 

 

 

 이 교회의 설립자는 김헌중 장로님이라고 한다. 경주출신의 선비이자 서당의 훈장이었던 김헌중 장로는 청송에 잠시 살았는데 대구로 이사를 가기 위해 고개를 넘다가 마침 영천에서 청송으로 넘어가던 안의와 선교사를 이 부근의 노귀재에서 마주친 모양이다.

Adams라는 성을 가졌던 안의와 선교사는 경주제일교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참으로 묘한 것이 안의와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은 김헌중 장로는 대구로 이사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 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예배당 건축에 나섰다고 한다.

 

 

 

 

 자신의 삶이 빛과 소금이 되도록 이끌어 나간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김헌중 장로는 그런 삶을 사셨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자신의 삶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다음 글에 계속)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