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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 3 - 기웃거리기

by 깜쌤 2008. 1. 11.

 

강변도 둘러보고 외나무다리도 거닐어 보았으니 이젠 마을을 자세하게 기웃거릴 차례이다. 변명을 겸해서 미리 드리는 이야기지만 나는 건축전문가도 아니고 민속학자도 아니므로 상세한 설명을 기대하시지는 말기 바란다.

 

앞에 보이는 두 초가를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오른쪽 집의 지붕은 황금색으로 단정하게 손질이 되어 있고 왼쪽 집은 회색으로 칙칙한 느낌을 주고 있다. 다 잘 아시다시피 황금색으로 빛나는 집이 최근에 새로 지붕갈이를 한 집이다. 초가는 그런 식으로 해마다 지붕을 갈아야 한다. 물론 삼사년에 한번씩 지붕을 새로 이어도 되긴 된다.

 

 

 

 

사진의 왼쪽 지붕을 보면 끝머리에 구멍 같은 것이 보일 것이다. 잘 안보이면 위 사진을 새로 보기 바란다. 그게 바로 까치구멍이다. 부엌에서 나오는 연기를 빼고 환기를 시킬 요량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보통 초가에서는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놀라운 일이 하나 있다. 이 집 마당에 심겨진 분재는 아무리 보아도 모두 매화같다. 몇번이고 확인해 보았는데 매화가 틀림없는 것같다. 나도 매화분재용 재배장을 한군데 알고 있지만 이렇게 많은 매화 분재용 소재가 가득한 곳은 보기가 드물다.

 

2월이나 3월초쯤 매화꽃 가득한 날 눈이라도 내린다면 여긴 완전히 설중매(雪中梅) 세계가 될 것이다. 매화꽃 향기는 말로 설명이 안된다. 그러니 그런 날이 온다면 꼭 한번 찾아가보는게 좋으리라. 더구나 분재용 나무가 아닌가 말이다. 

 

 

 

 

 

왼쪽 집 까치구멍을 보면 환기도 하고 연기를 빼내기 위한 플라스틱 굴뚝이 박혀있음을 볼 수 있다. 망가지긴 했지만 사립문 뼈대라도 남아 있어서 그런대로 옛집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이 집의 사립문이 훨씬 더 깨끗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낮으막한 담도 남아있다. 요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것이 담 축에 들어가기라도 하겠는가마는 우리 조상들은 그냥 영역 표시정도만 하고 사는 것으로 만족했음에 틀림없겠다.

 

예전에는 흙벽돌 만드는 것도 큰일이었다. 좋은 황토가 있어야 하고 짚도 있어야하고 알맞은 노동력도 있어야 했으니 담을 쌓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을 앞쪽으로는 물이 회돌이치듯 감아 흐르고 있었다. 강가로 새로 만든 도로가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어서 여러 방향에서 접근하기 편하도록 되어 있었다. 사진 속의 도로를 통해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면 평은 쪽으로 연결된다. 평은까지 나가면 안동이나 영주로 쉽게 갈 수 있고 봉화로도 올라갈 수 있다.

 

 

 

 

 주인은 어디로 나가셨는지 모르겠다. 널려 있는 옷 모양으로 봐서는 할머니가 사시는 것 같다.

 

 

 

 

댓돌위에 신발이 보이질 않았다.

 

 

 

 

 

 다른 한집엔 수수와 조가 달려 있었다. 노랗게 보이는 것이 좁쌀이 되는 조이고 진한 갈색으로 보이는 것은 수수다. 내년 봄에 심을 종자용인가 보다. 예전에 안동 사람들은 조 열매 덩어리를 서숙이라고도 불렀던 것 같다.    

 

 

 

 

사다리, 지게가 보이고 해바라기 씨가 통채로 들어있는 것을 매달아두기도 했다. 수세미 말린 것도 매달아 두었다.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집집마다 처마 끝머리에 풍경 달듯이  등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제 집의 까치구멍이 더욱 더 확실하게 보인다. 이상하게도 나는 기와집보다는 초가에 더 매력을 느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초가로 구성된 마을은 불이 나면 끄기가 어렵다. 한집 지붕에 불이 붙으면 곧바로 이웃집으로 옮겨붙게 되어 있다. 불에 잘타는 볏짚으로 이은 지붕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시골마을에서 한집에 불이 난다는 것은 동네가 한꺼번에 다 같이 망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니 불끄기에 필사적으로 나서야만 했었다.

 

 

 

 

 댓돌 위에 신발이 없는 것으로 봐서 주인은 출타중이거나 마실간 것(=마을가다의 경상도 사투리)이 틀림없다. 이 동네는 마을꾼들이 모이는 사랑방이 어딘지 궁금하다.  

 

 

 

 

 주춧돌 놓은 품이 예사롭지 않았다. 주춧돌 부근이 말갛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주인이 아주 깔끔한 성격을 지닌 것 같다.  

 

 

 

 

 부자양반들이 살던 집은 어딘가 달라도 다르다. 먼저 품격이 묻어나는 것 같다. 담부터가 다르고 집 크기가 다르다.

 

 

 

 

초가에는 앞에 달아낸 마루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기와집엔 쪽마루나 툇마루가 반드시 달려 있었다.

 

 

 

 

기둥에 써붙여 놓은 공자님 말씀이 눈에 띄였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중에서 학이시습(學以時習)이 떡 붙어 있으니 역시 양반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신우일신은 어떻고.....

 

 

 

 

열려진 대문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더니 사람사는 냄새가 풍겨왔다. 그래, 역시 사람이 살아야 동네 구경하는 맛이 나는 법이다. 마루에 잘 정돈해놓은 세간살이가 풋풋한 시골살이의 격을 더해 주었다. 

 

 

 

 

시멘트 가루를 섞어서 발라 놓은 아궁이여서 옛날 구수한 맛은 나지 않지만 그나마 반들반들 윤이 나는 까만 가마솥이라도 걸려 있으니 운치가 났다.

 

 

 

 

 

 부엌으로 올라가는 통로에 댓돌을 맨앞에 깔고 다른 돌로 계단을 만들었다. 마루 앞 댓돌에는 플라스틱 슬리퍼 한짝이 다소곳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님은 안에 계시는 모양이다.

 

 

 

 

기둥 옆에 매달린 빗자루하며 마루 밑에 깔끔하게 정리해둔 장작더미가 주인 어른의 정갈함을 나타내 주는 것 같다.  

 

 

 

 

 

 

 이엉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새끼줄을 덧입혀 붙들어맨 지혜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런 것이 생활속의 지혜였으리라. 옛날에는 이엉 밑 구멍속에 참새집들이 많았다. 제비들은 처마밑 벽에 진흙을 가지고 집을 붙여짓고 새끼를 치기도 했는데 그것을 노린 능구렁이가 슬금슬금 나들이도 다녔고......    

 

 

 

 

곡식이나 세간살이 저장 창고로 쓰던 광인 모양이다. 광에서(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광문을 열면 독특한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이젠 그런 냄새 맡기가 힘이 든다. 

 

 

 

 

관광객을 의식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집집마다 마루 밑 정리가 아주 깔끔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떼어 놓은 문짝하며 널어놓은 빨래가 사람사는 정취를 강하게 풍겨왔다.

 

 

 

 

 

 초가 앞에 달아낸 쪽마루에 앉아 해바라기 하던 옛날이 그리워졌다. 사랑방으로 쓰는 방쪽으로 작은 담을 달아낸 모습이 아주 이채롭다. 양반다움의 산물일까?

 

  

 

 

 처마밑에 제비집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여기도 제비는 잘 오지 않는가 보다. 하늘을 뒤덮던 제비들이 그리워졌다. 소나기 내리던 날 장쾌히 하늘을 가르던 제비들의 날개짓은 또 얼마나 시원했었던가?

 

 

 

 

창호지 한장 바른 문으로 겨울 추위를 이겨낸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셨다. 윗목에 떠놓은 자리끼(겨울밤에 마시기 위해 떠놓았던 물)가 꽁꽁 얼어붙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던가 싶다.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마을을 구경하던 나는 문득 배고픔을 느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여긴 하회마을처럼 상업화가 덜 되어서 그런지 음식점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강건너편에 있는 집이 주막구실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픔을 느꼈지만 그래도 언제 다시 오겠는가 싶어서 조금 더 살펴보기로 했다.

 

 

 

 

 민속마을로는 양동과 하회가 그런데로 규모가 여기보다는 조금 더 크다고 생각한다. 이젠 초가와 기와집 구경하기가 이리도 힘들어졌으니.....

 

 

 

 

 이집은 본채 기와집과 별채 초가가 같이 있었다. 이 정도가 되면 근동에서는 제법 잘사는 집이었음에 틀림없다.

 

 

 

 

 

 양반 동네가 그냥 예사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른 농토를 바탕으로 한 부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재들이 과거에라도 붙어서 벼슬아치가 제법 나와야 이루어지는게 아닌가 싶다. 유교문화권에 속한 고을로서 제법 유산을 잘 갖춘 동네가 안동이나 영주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