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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8 일본-문화의 꽃:중서부(完)

호류지(법륭사) - 담징 만나러 가기 3

by 깜쌤 2008. 6. 24.

 표를 사서 입장했다. 보기보다 상당히 깨끗하고 유적의 규모가 컸다.

 

 

 

 

 입장해서 대강당으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해서 왼쪽을 보면 있는 거대한 오중탑이 보인다. 오른쪽에는 2층집이 보이는데 오른쪽 집이 바로 금당이다. 법륭사 금당벽화라고 할때의 금당 말이다.

 

 

 

 

 오중탑의 위용이다. 이 절 속에 남아있는 목조구조물들이 전세계를 통틀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구조물인 모양이다. 정확한 기록인지는 모르지만 지금부터 약 1200년전 건물들이라고 하니 우리나라로 치면 통일신라시대 때의 건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왼쪽에는 오중탑, 그다음 중간건물이 대강당, 오른쪽이 금당이다. 이 건물군들이 세계최고의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다. 세계최대의 목조건물은 동대사(도다이지)로 알려져 있다는데.....

 

 

 

 

 탑 끝머리를 연결한 선들은 피뢰침의 접지용선들일까? 내가 잘모르니 함부로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 

 

 

 

 

 일본측의 사찰 안내 자료에 의하면 대강당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앞에 있는 청동구조물에 새겨진 그림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해치일까? 아니면 사자일까?

 

 

 

 

 상당히 사실적이다.

 

 

 

 

 아주 용맹스럽게 표현되어 있었다. 사자일까?

 

 

 

 

 성경기록이나 역사기록에 의하면 로마시대 때만해도 오늘날의 중동지방에도 사자들이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아시아인들에게 사자는 낯선 짐승이 아니었다. 오늘날 중국 남쪽인 시상반나지방만 해도 코끼리가 살고 있지 않은가?

 

 

 

  

 지금도 인도 서부에는 소수의 사자가 살고 있으니 고대에 사자를 사냥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거나 직접 본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불교가 인도에서 한때 융성했지 않은가?

 

 

 

 

 심지어 사자는 그리스 지방에도 서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많았던 사자가 지금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시아 사자가 멸종 위기에 몰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간들이 사냥해서 잡아 죽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지만 질병으로 인해 사라져 간 것도 또다른 원인이 된듯하다.

  

 

 

 

 

 대강당 쪽에 오중탑과 중문과 금당을 본 모습이다. 금당의 모습은 다시 보여드릴테니까 조금만 참으시기 바란다.

 

 

 

 

 대강당 뒤에도 건물이 하나 더 있다.

 

 

 

 

 돌아나오면서 담밖으로 펼쳐진 이카루가 지방의 모습이다. 상당히 너른 분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분지는 나라까지 연결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우리 조상들은 이 부근에서 고국의 냄새를 맡았던 것일까? 그들은 새로운 신천지에서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갔던 것이리라.

 

 

 

 

 확실히 법륭사에서는 약간 한국적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녀야 할 길을 표시해 두었으므로 이런 길만 따라가면 별 탈없이 둘러볼 수가 있다.

 

 

 

 

 이 건물이 금당이다. 담징이 그린 그림이 남아 있었다는 건물이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들은 다시 한번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정한숙씨가 1955년 발표한 소설 <금당벽화>에는 담징이 금당벽화를 그린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사실 법륭사를 안내하는 일본측 자료 어디에도 담징이 그렸다는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의도적인 역사 왜곡일까? 아니면 역사적 근거가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애써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에 찾아가는 것일까?

 

일본 역사책인 <일본서기>에는 서기 610년 고구려의 화승(畵僧) 담징이 호류사를 방문했다고 기록된 부분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담징이 벽화를 그렸다는 말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명백한 반론도 있다. 예전 일본 자료에는 고구려에서 온 화승 담징이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그 부분에 관해서 나는 정확하게 잘 모르지만 혹시 궁금하면 http://blog.daum.net/ysriver21 같은 곳에 가서 자세히 읽어보고 나름대로 판단하시기 바란다.

 

 

 

 

 

 미술을 전공하는 분들이 분석한 어떤 자료에 의하면 금당벽화의 기법과 그림 내용으로 보아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은 있지만 역사적 기록은 없으니 꼭 담징이 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보장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고 하니 한참 헷갈리게 생겼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찾아가는 것일까? 무엇때문에? 나는 심히 혼란감을 느꼈다. 그러길래 역사 기록은 중요한 것이다. 어쩌다가 고려시대 중반에 쓰여진 삼국사기가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적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분명히 신라 고구려 백제는 자기 나라 역사를 기록했었건만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불타 없어졌는지 의도적으로 숨겨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흔적조차 찾을 길 없으니 일본측에서 온간 해괴한 소리를 지껄여도 반박할 자료가 명확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럴때마다 분통이 터지는 것 같다. 과연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역사의실체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속이 상해 하늘을 보는데 금당 처마를 끼고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이 말많은 금당 벽화는 1949년의 화재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다니 더욱 더 기가 찰 일이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모사품이라니 알아서 판단하시기 바란다. 물론 타다남은 부분은 잘 보관되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우리가 갔을때는 금당의 보수 작업때문에 개방조차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말은 아주 뺀드랍게 잘 해두었다. 나는 일본어를 잘 모르므로 영어로 된 부문만을 읽어 보았다. 미안하고 도와주어서 고맙단다. 뭘? 

 

 

 

 

 약간 각도를 달리해서 찍어본 모습이다.

 

 

 

 

 자, 이젠 지나간다.

 

 

 

 

 수많은 일본학생들은 당연히 호류지에 대한 자긍심을 가득 지닌채 돌아나갈 것이다.

 

 

 

 

 역사의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를 호류지 경내를 벗어나야만 했다. 정원사가 고목을 손질하고 있었다.

 

 

 

 

 호류지 구석구석을 다 볼수는 없어서 눈도장만을 찍고 돌아나온 곳도 있다.

 

 

 

 

씁쓸함을 안고 돌아 나가는 우리들을 오중탑 꼭대기가 배웅해주고 있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