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천이 산모롱이를 이리저리 굽어 감돌때마다 아름다운 경치를 남겨 두고는 사라져 갔습니다.
면경처럼 투명하고 맑은 물이 흐르던 좋았던 시절은 이제 꿈속의 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전에는 이 물을 그냥 떠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았습니다.
산딸기꽃이 피었습니다. 빨갛게 익은 산딸기는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이고 새콤한 맛을 느끼도록 해 주었습니다. 덜익은 산딸기 하나도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따먹는 생존 식량이었습니다.
버드나무 그늘에는 갈겨니나 쉬리 같은 고기들이 놀았습니다만 쉬리 같은 고기들은 이젠 보기가 어렵습니다. 물이 흐르는 모래바닥을 살펴보니 아직도 모래무지 새끼들이 떼거리로 모여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친구도 이 개울에서 물장구도 치고 물고기도 잡으며 놀았을 것입니다. 그나마 같이 학교를 다녔던 친구가 부근 도시에서 공무원으로 생활하는 덕분에 일년에 한번 정도는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작은 동네였지만 동기들은 제법 되었습니다. 이젠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향방을 모르고 삽니다. 앞뒤 그리고 옆까지 산으로 가려진 동네여서 많은 수가 모여 살 수가 없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농촌을 지키고 계시는 어른들이 한두분이나마 남아 계시니 다행입니다만 저분들이 돌아가시면 누가 와서 살지 걱정이 앞섭니다.
강변 작은 공터에는 들꽃이 떼를 지어 피었습니다만 봐줄 사람조차 없는 듯 합니다.
나는 좁은 들길을 따라 걸으며 동네 분위기를 살폈습니다.
인적은 끊어졌고 사람소리가 나질 않았습니다. 동네에서 어린 아이들 울음소리가 사라진지는 꽤 오래된 듯 합니다.
그래도 한 집에는 수국과 함박꽃이 가득 피어있어서 사람 사는 정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함박꽃이라고도 불리우는 작약이 지면 그 다음에는 무슨 꽃이 필지 궁금합니다.
이런 산골엔 유선방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니 당연히 큰돈을 들여 위성방송 수신장치라도 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동구밖 길에는 작약이 무리를 지어 피었지만........
한번은 집에 가는 친구를 따라 여기까지 놀러를 왔습니다. 친구 집에서 저녁을 잘 얻어 먹은 뒤 자고 다음날 아침에 학교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는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날은 저물고 해는 떨어져 깜깜했는데 어머니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아마 4학년때의 일이었지 싶습니다. 나도 자식을 기르면서 당시의 어머니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집이 어디인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정말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는데 일찍 이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참으로 박학다식해서 어리버리했던 내가 새소식을 참 많이도 주워 들었습니다.
캐시어스 클레이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 친구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라디오 뉴스를 즐겨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러길래 그런 위대한 복서의 이름까지 환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캐시어스 클레이가 바로 개명하기 전의 무하마드 알리입니다. 소니 리스튼과의 역사적 시합 이야기도 그 친구에게 들었습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같이 쏜다"라는 전설적인 명문 귀절도 그때 얻어들었지만 그 친구는 간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가마솥조차 세월의 무게 앞에 벌겋게 녹슬어가고 있는 지금, 나도 이제는 녹슬어가는 인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부뚜막에서 온기가 사라진지 제법 되는 것 같습니다.
예전 해거름에는 골목길에 나온 엄마가 아이들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녁 먹으러 오라는 말이었지요. 시골 아이들은 소를 몰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꼴을 먹인 뒤 해가 질때 쯤에 끌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소가 전재산이던 시기였지만 아이들이 아니면 소먹일 시간이 없었으니 다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논일 밭일을 할땐 이웃집 소를 빌려서 쓰기도 했습니다. 회칠한 벽이 깔끔한 집이지만 이젠 누가 사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방문에 채워진 자물쇠가 주인이 집을 비웠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친구가 어느 집에 살았는지가 왜 이렇게 기억이 안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집에는 사람은 없고 고양이 한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녀석은 졸아가며 집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마리는 대청 밑에서 제 밥그릇을 끼고 있으면서 나를 훑어 보았습니다.
담배건조장인가 봅니다. 염천 땡볕 아래에서 담배잎을 따는 것은 정말 고역이라고 그럽디다. 나는 담배농사는 안 지어보았지만 그게 그리 일거리가 많다고 그러더군요.
이젠 이런 흙벽돌집도 보기가 어렵습니다.
옥수수대나 싸릿대를 옆으로 얽어매고 황토를 바른 뒤 다시 회칠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집들 속에서 살아온 우리들이니 위생상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발로 밟아서 곡식을 떠는 탈곡기가 주인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이젠 이런 기계를 쓰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벼며 콩이며 보리까지 다 해치웠던 타작기계들이지만 그냥 한구석에 버려지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전원생활이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농촌에서의 삶은 고달프기만 합니다.
세월이 더께가 되어 내 가슴에 두텁게 내려앉았습니다. 삶이 자꾸 딱딱해지고 건조해는 것 같아서 마음을 내어 찾아가 본 것이지만 오히려 더 무거워졌습니다. 왜그런지 내가 떠도는 하숙생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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