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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8 일본문명의 시원-큐슈(完)

쿠마모토 8 - 검객 무사시

by 깜쌤 2008. 4. 9.

 전통공예관 나오는 출구 부근에 가지런하게 가져다 놓은 작은 항아리를 우산꽂이로 사용하는 아이디어가 깜찍했다. 나도 나중에 가게를 하나 차린다면 한번 시도해 보아야겠다.

 

 

 

 

 전통공예관을 나와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일본공영방송국인 NHK 건물이 나온다. 그 부근에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미야모토 무사시의 유적지가 있기 때문에 그 근처를 자세히 살펴볼 생각이다. 

 

 

 

 

 나는 일본의 NHK나 영국의 BBC를 볼때마다 부러움을 느낀다. 그런대로 널리 인정받는 공영방송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방송국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의 질은 또 어떤가? 편파적인 보도태도 때문에 자주 문제가 되는 우리나라의 어떤 방송국을 보면 한숨쉬기 차원을 넘어 이젠 희망가지기조차 포기를 했다. 

 

3공화국 시절 이래로 권력자의 편을 들던 그런 모습이 역겹기조차 하거니와 걸핏하면 자기들이 옳다고 우기며 국민을 가르치려고 덤벼드는 오만방자한 자세를 보면 화가 치밀 정도이니 이젠 그 방송국 보도 프로그램은 아예 무시하고 산다.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혹시 내가 구시대적인 조중동의 수호자라는 식으로 함부로 지레짐작하여 말하지도 마시기 바란다.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면 좋다고 여기는 동물(?)이긴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곤란하지 않는가?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궁본무장)! 나는 청춘 시절에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길천영치)가 쓴 <미야모토 무사시>를 읽어보았다.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았기에 처음에는 상상속의 인물인줄로만 알았다가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조금은 놀랐다.

 

미야모토 무사시와 바지랑대라고 불리우는 장검을 쓰던 사나이 사사키 고지로오와의 결투 장면은 얼마나 흥미진진했었던가? 사사키 고지로에 대해서는 실존 인물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은 모양이나 일본측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1612년 4월 13일 후나시마 섬에서 죽은 것이 유력하다고 한다.

 

어쨌거나 평생동안 60여차례의 결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 무패의 신화적인 기록을 남긴 무사시가 이 부근에 와서 살았다니 어찌 안살피고 지나치겠는가 말이다.

 

 

 

 

 

 그는 1584년에 출생해서1645년 6월13일 경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으니 그런 사실과 견주어 보면 그의 일생을 대강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남긴 책 오륜서(五輪書)에 의하면 그의 나이 열세살에 결투를 해서 상대를 죽인 적이 있는 모양이니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에 의해 조선에 출병중이던 군대가 퇴각하면서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를 편드는 서군(西軍)과 도쿠가와 이에야쓰를 편드는 동군 사이에 천하를 놓고 다투는 전쟁이 발생하는데 그게 서기 1600년 나고야 부근의 평야에서 있었던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이다.

 

무사시는 이때 17살의 나이로 서군 병졸로 출전했던 모양인데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지휘했던 서군이 패함으로서 도쿠가와이에야쓰가 권력을 잡게 된다. 서군으로 출전했던 미야모토 무사시는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다쿠앙이라는 스님에게 구원을 받아 나름대로 새로운 무도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원래 이름인 신멘 다케조오에서 미야모토 무사시로 개명한 뒤 교토에 재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NHK부근을 뒤졌다. 그러다가 찾아낸 것이 무사시가 사용했다는 우물터였다.

 

 

 

 

 

 이제 우물은 나뭇잎과 잡초로 덮여있었다.

 

 

 

 

 

 무사시는 쿄토에 등장하면서 이른바 도장깨기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한참 젊었던 나이였으니 승부욕과 공명심에 젖어 어지간한 결투는 모두 치루어 본 모양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대단한 명성을 쌓아갔다고 전해진다.

 

무사시에 대한 일본 안에서의 평가는 다양한 모양이다. 검성(劍聖)정도로 미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것 아니었다는 식으로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던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관심을 가졌던 무사시라는 검객이 늙으막에 살았던 터가 이 부근에 있다는 것을 찾아본다는 의미 외에는 별다른 뜻이 없다는 것이다.

 

 

 

 

 

 무사시가 여기 쿠마모토를 찾아온 것은 서기 1640년의 일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쿠마모토를 지배하고 있던 호소카와 타다토시의 초청을 받아 이곳까지 흘러 들어온 그는 결국 여기에서 영면하고 마는 것이다.

 

이때 이미 가토 가문은 몰락하고 만 뒤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의 편을 들어 승리자의 기쁨을 누리지만 가토 기요마사가 죽고 난 뒤 아들 대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하면서 호소카와 가문에게 영지를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무사시의 유적을 대충 살펴본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걸었다. 이젠 쿠마모토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나 올라보면 될 것 같았다. 무사시의 유물을 살펴볼 수 있는 기념관이 시내 한구석에 있다고 하지만 거기까지 찾아가 보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뭐 무사시 숭배자도 아니지 않은가?

 

 

 

 

 

 사람은 가고 흔적만 남았으니 쓸쓸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바로 위 사진을 보면 쿠마모토성과 쿠마모토 현 전통공예관, 그리고 미야모토 무사시의 유적이 한꺼번에 다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개울을 낀 도로로 내려섰다. 이젠 슬금슬금 걸어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