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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8 일본문명의 시원-큐슈(完)

나가사키 5 - 폭심지에서

by 깜쌤 2008. 2. 27.

 일왕(日王) 히로히토(유인, 1901.4.29~1989.1.7)가 세계 제2차대전 추축국의 마지막 일원으로서 연합국인 미국에게 항복선언을 한 것이 1945년 8월 15일 정오이니까 항복선언 1주일 전인 1945년 8월 9일에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이 장소에서 일어났다.  

 

사진을 보면 검은 색 기둥이 보일 것이다. 바로 그 장소에 미국이 투하한 2번째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터진 것이다. 두 발의 원자폭탄 폭발의 위력에 놀란 일본은 소위 황국신민(皇國臣民) 1억 전체 인구가 옥쇄(玉碎)한다던 결의를 없었던 일로 던져두고 항복선언을 한 것이다.

 

 

 

 

 

 나는 원자폭탄이 폭발한 그 장소만은 꼭 보고 싶었기에 이 다리를 건너가기로 했다. 다리를 건너면 곧이어 공원이 나온다. 흑백 혼혈인듯한 까무잡잡한 피부의 아가씨가 폭심지 공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저 장소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눈앞에 보이므로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지던 사흘전인 1945년 8월 6일 칸사이 지방의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그게 폭발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이 발생했다.

 

히로시마 다음으로 두번째 목표로 찍혔던 도시는 북큐슈 지방의 고쿠라(小倉)였다. 위치 확인을 해보시기 바란다. 바로 아래 지도의 윗부분에 고쿠라라고 적힌 초록색 글씨가 있는 곳이다. 그날 8월 9일 고쿠라 상공에는 짙은 먹구름이 덮혀 있었던 모양이다.

 

 

 

 

 

 

 

미국이 자랑하던 B-29 폭격기 가운데 애칭 Bock's Car로 불리던 비행기 한대가 티니안 섬에서 이륙하여 고쿠라 상공에 도착했지만 짙은 구름으로 인해 공격목표를 찾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폭격기가 남하하던 중 조선산업이 발달했던 나가사키를 발견하고 폭탄투하를 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나가사키는 고쿠라에 이어 두번째 목표로 선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도를 보면 고쿠라와 나가사키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육지에서의 거리로 보면 꽤 되는듯 하지만 폭격기의 입장에서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나중에 나가사키 항구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지만 나가사키는 현재도 조선산업이 발달한 곳이니만큼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미쓰비시(三菱)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 보았을 것이다. 미쓰비시 중공업,  미쓰비시 자동차, 미쓰비시 은행 등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중이다. 미쓰비시 조선소가 바로 나가사키에 있었다. 전함 무사시(戰艦 武藏)호라고 들어보셨는가? 무사시호를 안다면 당신은 해전(海戰)에 대해 기본은 논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분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제 2차대전에서 일본군 제독으로 진주만 기습을 실행으로 옮겼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기함으로 쓰임받은 어마어마한 전함이 무사시호다. 무사시라는 말이 유명해지게 된 기원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잘못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전함 무사시호가 건조된 곳이 바로 나가사키인 것이다. 그러니 나가사키라는 도시가 핵공격의 목표가 된 것은 자업자득인지도 모른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500미터 고도에서 투하된 원자폭탄은 원래 목표였던 미쓰비시 조선소를 벗어나 성당이 있던 바로 이자리에 떨어져서 폭발했고 당시 인구 24만여명 가운데 75,000명 정도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물론 한국인 징용자들도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그 숫자가 약 13,000여명 정도가 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이 자리에 한국인 징용노동자를 위한 기념탑 정도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못본 것인지는 모르지만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기사 몇년전 우리 장병이 서해 해상에서 있었던 전투의 교전중에 전사를 해도 장례식에 그 잘난 얼굴(이럴 때는 낯짝이라고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싶지만 애써 참는다) 한번 들어내지 않는 양반들이 지도자로 있으면서 목에 힘주는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었으니 그런 것을 기대하는 나같은 인간이 쪼다가 되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 중에 붙들려간 국군포로 알기를 무슨 오물 정도로 여겨 수십년동안이나 신경쓰지 않고 살았지 않았던가 싶기도 하다.  

 

 

 

 

 

 연합군 포로들도 200여명이 폭발 순간에 죽은 모양이다. 원자폭탄의 위력은 새삼스럽게 논하지 않기로 하자. 어쨌거나 단 한번의 폭발로 반지름 1킬로미터안에 있었던 건물들과 사람은 재로 변해 사라져버렸고 3.5킬로미터 밖에 있던 사람들도 화상을 입었을 정도였다니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원자폭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자연의 위력인가 보다. 방사능 오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풀은 자랐고 나무들이 자랐으며 개울에는 잉어가 살고 있으니 자연의 회복능력과 정화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초강력 에너지를 가진 모양이다.

 

현장에 있던 성당은 기둥만 남기고 사라졌다. 나가사키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그리스도교인들이 살고 있었다던 도시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일본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전파된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대원군의 쇄국정치도 유명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의 에도 바쿠후의 쇄국정치도 그에 못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서양에 대한 창구는 열어두었는데 그 도시가 바로 나가사키이니 성당이 건립되어 있엇던 것은 조금도 이상할게 없는 것이다. 일본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인구의 1%가 채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와 성당보기가 그만큼 어려운 나라이건만 폭심지에서 한 5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새로 잘 지은 우라카미 성당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공원에는 조용한 평화가 감돌았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이다. 자기들이 저지른 과오에는 애써 무심해 하면서 입은 피해를 가지고는 잘도 떠들어대기만 하니 이상하기도 해라. 요상하기도 해라. 괴상하기도 해라. 이상야릇하기도 해라. 괴상망칙하기도 해라.

 

 

 

 

 

 한겨울에도 잎푸른 나무들이 무성한 잎사귀를 달고 있는 나가사키는 전쟁을 이겨내고 싱싱하게 부활해서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조금 남은 성당 기둥들이 역사의 편린을 안고서 시간의 무게를 버텨내고 있었고.....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정적 속에 평화가 숨쉬고 있었다.

 

 

 

 

 

 폭심지 공원을 빠져나온 우리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부근을 어슬렁거리다가 좋은 먹이감을 발견한 승냥이처럼 우동집을 향하여 슬그머니 스며들어갔던 것이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