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경주, 야생화, 맛/맛을 찾아서

추억의 돼지국밥집

by 깜쌤 2007. 12. 24.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밥의 향취가 점점 사라져가는 요즘 국밥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새록새록 묻어오르는 날이 있습니다. 보통 국밥이라고 하면 쇠고기 기름이 둥둥 뜨는 벌건 국물에 무와 토란 줄기같은 여러가지 채소를 듬뿍 썰어 넣은 소고기 국밥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지금 제가 소개하고자 하는 국밥은 뽀얀 국물이 정겨운 돼지고기 국밥이니 조금은 특별한 경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국밥은 어느 지방에 가더라도 조금씩 알려진 집이 있게 마련이어서 걸쭉하게 소개하기도 조금 무엇하지만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에서 꺼내보는 이야기이므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돼지국밥이라고 하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상호는아마 밀양돼지국밥인 것 같습니다만 경주 돼지국밥골목에 위치했던 많은 집들도 그에 못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처음 경주에 발을 내디딘 것은 지금부터 30년전인 1977년입니다. 당시만 해도 경주 시내 한가운데 돼지국밥 골목이라고 하는 곳이 있어서 수많은 돼지 국밥집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도 않았던 젊었던 날이라 퇴근길에 들러 소주 한두병을 시키고 나서는 고기가 듬뿍 들어간 국밥을 안주삼아 출출한 속을 채우면서 연탄불이 들어있는 화덕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능했었습니다. 이제는 안동 어디에선가 교육경영자로 활동을 하고 있을 중고등학교 동기동창인 ㄱ선생과 자주 만나 서로의 어려움을 토로해가며 소주 한두병을 여사로 비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랬던 것이 1980년대가 되어 개발의 열기가 밀어닥치면서부터 그 많던 돼지국밥집이 하나씩 사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그자리에는 옷가게가 들어서고 또 다른 업종이 슬슬 자리를 꿰차기 시작하더더니 그 유명했던 골목이 점점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만 그득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고급화되고 서양화되기 시작한 사람들의 입맛에 밀려 그런지 젊은이들은 전통의 그런 구수한 맛을 차츰차츰 잊어버리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얼마전 텔레비전에 경주 시내의 재래시장이 소개되는 가운데 돼지국밥집이 화면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런 집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고?"

  

 

 

 반가움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며칠을 벼르다가 경주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성악가 한분과 같이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경주시내에는 작은 시장이 몇개 있지만 예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경주역 부근의 성동시장과 아래시장(=중앙시장)이 제법 유명합니다. 아래시장 속에는 당연히 시장상가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속에 돼지국밥 집들이 소복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전 선술집들처럼 나무 의자들이 놓여있고 좌판 형식의 작은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공간이 툭 터져 있어서 다른 집 형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두었습니다. 나무 의자에 전기 장판 비슷한 것을 덧대어 깔아두어서 의자에 앉으니까 엉덩이가 따뜻해져 왔습니다.

 

 

 

 

어느 집이 특별히 잘 하는지를 모르니 일단 입구 부근에 있는 집을 골라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모를 때는 할매 상호가 들어간 집을 찾아 앉아보는 것도 한가지 요령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요즘은 그것도 너무 믿을게 못되는 것 같습니다.   

  

반찬이 담긴 작은 그릇들 속에는 파절임과 멸치젓갈과 양파절임, 김치 등이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발효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젓갈 같은 것을 특별히 선호하는지라 멸치젓이 먹음직스러운 집을 골라 앉은 것이죠.

 

 

 

 국밥 두그릇을 주문 했더니 즉석에서 미리 삶아서 건져 둔 돼지고기 부위를 이것저것 골라서 막 썰어넣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많이 준다 싶을 정도로 수북하게 넣는 것에서부터 넉넉한 시장 인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역시 이런 데를 와봐야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골라 앉은 집은 시어머니가 돼지국밥 골목에서 30년간 장사를 해 온 집이라고 하는데 이제는 며느리 되는 분이 장사를 맡아 하는 집이라고 하더군요.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말이 잘 통했습니다. 돼지국밥 골목의 역사를 훤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뚝딱 한상을 차려주는데 국물 맛이 진했습니다. 도야지 고기를 먹는데는 새우젓이 빠질 수 없습니다. 국에 새우젓을 넣어서 간을 맞추어 먹으라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가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보얀 쌀밥 한공기를 같이 주니 한끼 식사로는 그저 그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돼지순대국밥을 잘 한다는 시내의 어느 유명한 체인점을 찾아가 보았습니다만 아래시장에서 먹은 돼지국밥 집의 국물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양은 또 어떻고요?

 

나는 아무래도 고급인간은 못되는가 봅니다. 길표신발이 발에 잘 맞고 시장표 음식이 입에 잘 맞으니까요. 경주에 오시거든 한번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아참, 얼마냐고요? 밥 한공기를 포함해서 한그릇에  4,000원입니다. 예전에는 500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죠. 그래도 4천원에 배부르게 실컷 먹고 든든하게 일어설 수 있는 음식은 아무래도 아직은 드물지 않을까요?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