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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옛날의 금잔디 Long Long Ago (고향)

고무신

by 깜쌤 2007. 8. 23.

 

고무신!

이름 그대로 고무로 만든 신발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짚신을 삼아서 나에게 보여주시기도 하고 한번씩은 그렇게 삼은 짚신을 신고 일을 하시기도 했다. 한켤레 정도 보관을 해둘걸 그랬다. 1960년대와 70년대만 해도 고무신을 참 많이 신었다. 나는 196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으니 고무신 세대라고 불러도 될것 같다.   

 

 

 

 

 

댓돌 위에 얌전하게 벗어놓은 남자용 흰고무신과 여자용 코고무신의 단아함은 잊을 수가 없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검정 고무신이 시골에도 들어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기차표 통고무신이 특히 유명했던 것 같다.

 

그때의 흰고무신은 조금만 신고다녀도 밑바닥이 쉽게 닳아버려 구멍이 나기도 했는데 검정색 고무신은 얼마나 질긴지 한번 사면 적어도 반년 이상은 신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은 나와 고무신에 얽힌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옮겨 보고 싶다. 한번씩은 흰머리카락을 가지고 서로 비교를 해보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이니 구닥다리들 세대의 이야기이긴 해도 그냥 가볍게 흘러 넘기기에는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소개해 보는 것이다.

 

 

 

 

"할머니께서는 나를 업어서 키운 분입니다. 할머니가 손주를 업어서 키운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아버지께서 직장일로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사셨으므로 부득이 할머니께서 나를 키워야만 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전의 일이니 적어도 너대여섯살때의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경주 가까운 시골에서 사시며 신앙심이 아주 돈독하셨던 할머니께서는 새벽에 나를 깨워 어떨 땐 업기도 하고 어떨 땐 걸리기도 해서 새벽기도를 드리기위해 교회로 나가셨습니다.  

 

 

 

 

어느날 새벽 할머니께서는 나를 데리고 새벽기도를 나가시다가 마당 한구석에 쌓아둔 짚더미에서 짚 하나를 빼셨습니다. 정갈하게 다듬어서는 이빨로 적당하게 끊은 뒤 한손에 곱게 들고 어두운 길을 걸어서 교회로 걸어가셨습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할머니께서 하시는 그런 행동을 그냥 멀거니 보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한쪽 구석에 젊은 전도사님이 거처하시던 전도사관이 있었는데 불이 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일어나시기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할머니께서는 소리나지 않게 조심해가며 살금살금 마당을 가로질러서는 전도사님이 벗어놓은 댓돌 위의 고무신을 유심히 살피셨습니다. 손으로 만져보시기도 하고 바닥을 살펴보시기도 했습니다. 새벽달이 떠 있어서 사방이 조금은 구별된다고 해도 노안(老眼)에 살펴보시기가 어려웠을터인데도 몇번이나 확인을 하시더니 곱게 신발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아까 짚단에서 빼내 다듬어 놓으신 짚을 가지고 고무신에 대어보고 정확하게 크기를 재신 할머니께서는 짚에 당신만 아시는 표를 해놓으신 뒤 품에 넣으시고는 예배당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단아한 자세로 꿇어앉으신 할머니께서는 나를 옆에 앉힌 채로 소리를 죽여 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떨 때 할머니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가득 흘러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제 머리카락이 제법 허옇게 변한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짚으로 고무신 치수를 재어 보신 그런 날이면 할머니께서는 꼭 닷새마다 서는 시골장에 가셨습니다. 

 

장에 가서는 제일 먼저 신발 파는 난전을 찾으셨고 품속에 간직해오신 짚을 꺼내서 그 치수에 맞는 흰고무신을 한켤레 사셨습니다. 그럴 때는 신발 장수가 달라는 대로 아무 말없이 돈을 치루셨습니다. 알뜰하게 아껴가며 살림을 사셨던 할머니께서는 깎는 모습 한번 보이지 않고 선선히 돈을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사오신 신발을 곱게 씻어서 햇살 잘 드는 양지쪽에서 말리신 뒤 다음날 새벽에는 다른 날보다 훨씬 더 일찍 나를 깨워서는 품에 고무신을 꼭 안고 집을 나섰습니다.

 

마당 한구석에 서서 전도사님께서 일어나셨는지 인기척은 있는지를 확인하시고는 살금살금 곱게 걸어 가셔서 댓돌 위의 헌고무신 옆에 새고무신을 놓으시고 돌아서서 종종걸음으로 잽싸게 마당을 빠져 나오셨습니다.

 

  

 

 

 할머니는 그런 행동을 철저히 비밀로 하셨습니다. 추운 겨울날에는 할머니께서 일찍 전도사관에 가셔서 고무신을 품에 안아서 따뜻하게 데워 놓으신뒤 나오시는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할머니는 그런 자세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많이 배운 것도 없고 큰 살림 없는 가운데에서도 고아함과 단아함으로 일생을 사신 할머니 덕분에 나는 질풍노도와 같다는 청년의 때에 크게 방황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친구의 할머니는 경주 시내에서 가까운 모량 동네에 사셨다. 모량이라면 목월(木月) 박영종 선생의 고향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기차를 타고 시골 부모님을 뵈러 다니면서 나는 이 동네를 지나칠 때마다 가슴속에 잔잔한 감동이 일어남을 느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분들이 가득한 세상은 얼마나 멋진 곳인가?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