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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4 중국-운남,광서:소수민족의 고향(完)

고도 리장(麗江) 9 - 옥룡설산

by 깜쌤 2007. 1. 11.

 어제 밤엔 마당에서 다국적인들 사이의 대화가 이어졌었다. 호주에서 온 백인과 중국 외국어고등학교 아이들이 뒤섞여 대화를 하는라고 시간가는 줄 몰랐다. 배운 사람들답게 우리나라 행정수도 이전 문제까지 대화가 이어져서 내가 진땀을 빼야만 했다.

 

대화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서 쉬려는데 11시 넘어서였던가 우당탕퉁탕 소리도 요란하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중국인 특유의 소란스러운 대화가 바로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예전엔 천장에 쥐들이 많았다. 종이 벽지를 바른 천장에 쥐들이 들어가서 달리기를 하면 요즘 시끄러운 아파트 위층에서 나는 소리 만큼이나 소란스러웠었다. 천장에 올라간 쥐들이 달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잠자는 것은 글렀다고 보면 된다. 성질이 나신 아버지께서는 빗자루를 던져올리고 어머니께서는 걸레를 집어던지기도 했으며 나는 교과서를 던져보기도 했다.

 

쥐새끼들이 빗자루가 로켓마냥 솟아 올라 천장바닥에 부딛히는 소리에 놀라고 책이 올라와서 쿵하고 경천동지라도 하는 양 요란스레 흔들리면 잠시 조용해지지만 이내 다시 난리가 나기 시작했었다. 

 

지금이 바로 그꼴이다. 너무 시끄럽다. 평소에도 소리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는 순간적으로 열이 뻗쳐서 문을 열고 이층으로 올라가서 노크를 하고 한바탕 퍼붓고 말았다.

 

"몸은 한없이 피곤한데 당신들 떠드는 소리에 잠을 잘수가 없소. 우린 모두 외국인들이오.(외국인이 다는 아니지만) 어쩌고 저쩌고~~ 제발 조용히 해주시도록 부탁 좀 합시다."

"아하 그렇습니까? 정말 미안합니다. 조용히 하도록 하지요."

 

상대편의 기분을 생각하여 끝머리에는 웃는 것으로 끝냈지만 사과를 받아내고서야 기분이 조금 풀려 내려왔다. 그렇지만 이내 잠을 들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ㄱ선생이 한마디 한다.

 

"우와, 우리 팀장 성질 한번 대단하시네. 그런 면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소."

 

졸지에 나만 인간성 더러운 놈으로 찍히고 말았다. 사실 여행중에 현지인과 다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나중에 곤명에서 기차표를 끊을때도 줄기차게 이어지는 새치기에 그만 성질이 나서 기어이 주위 사람들과 경찰(=공안)에게 한마디하며 항의하고 넘어갔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라는 인간은 본래 천성이 그리 고분고분한 사람은 아니지 싶다. 성격도 옹졸하고 잔챙이 기질을 가진 내가 조금 마음이 변한 것은 순전히 신앙생활덕이라는 것을 안다.  

 

   

 어제 저녁 주인 객잔 아줌마를 통해 옥룡설산을 다녀오기 위한 택시를 교섭해 두었었다. 나는 저번에 한번 가보았으므로 이번에는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기를 원했기에 ㅎ,ㄱ선생 두분을 위해 차를 교섭해야만 했던 것이다. 

 

汝家所有包車(的士 택시)?

 

영어가 안되니 한자로 써서 대화를 한다. 간자를 사용해서 대화하면 더욱 더 효과적인데 결과는 하루 80원으로 낙찰되었다. 80원이면 당시 환율로 쳐서 중국돈 1위엔을 우리돈 150원으로 볼때 12,000원 정도였다. 아침이 되니 약속대로 택시 거간꾼 아줌마가 우리 일행을 데리러 왔다.

 

셋이서 따라 나섰더니 작은 고개 부근에 택시를 대기시켜 두었다. 다시 한번 더 금액을 확인한 뒤에 차를 타고 옥룡설산을 향해 달렸다. 설산 입구 부근에서 나는 내렸다. 두분을 보내고 나는 혼자 산까지 걸어가서 아무곳이나 돌아보다가 오기로 한 것이다.

 

 

내려서 눈덮힌 산봉우리를 목표로 삼아 산으로 난 길을 걸으려니 말(馬)을 끌고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와 몰려들어서 타라고 아우성이다. 나는 말없이 내 두다리를 기리켰다. 그랬더니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고 그들은 순순히 물러서고 만다.

 

오늘은 내 혼자 걷는 것이다. 옥룡설산 기슭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돌아오기로 했으므로 크게 바쁠일도 없었다. 슬금슬금 걷다가보니 어는 덧 산밑에 자리잡은 마을 속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산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니 그냥 손가락으로 방향만 가르쳐준다. 고즈녁한 평화가 깃든 마을은 돌담과 돌집에다가 흙벽돌로 이루어져서 어찌보면 우리나라 시골길을 걷는 듯했다.    

 

   

 무작정 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가녀린 야생화들을 한번씩 살펴본다. 산기슭은 보기보다 건조한 토양이었고 바싹 마른 대지 위에는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을 한앙징맞은 작은 야생화들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눈덮힌 산봉우리는 보기보다 멀리 있었기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다가 배가 고파진 나는 결국 도로위로 내려오고 말았는데 자세히 보니 옥룡설산 들어가는 도로의 입구에 와있었던 것이다. 도로 옆에는 경비초소가 자리잡았고 인민해방군 막사가 보였다.

 

근무를 서는 병사에게 부근에 식당이 있는지를 물었는데 내 질문 자체가 어리석었다. 이 산 한가운데서 식당이 있을리가 없는 것이다. 차를 타고 가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교통편도 없으니 찾는 내가 바보인 것이다.

 

그런데 내 상황을 알아본 해방군 병사는 도로가에 자리잡은 자기들 막사를 가리켰고 먹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 거기가 식당인줄로만 알았다. 검문소 안에서 차를 얻어마시고 잠시 쉬고 있는데 해방군 병사둘이 함께 가자는 신호를 해왔다. 그들을 따라 가보았더니 거긴 병사들 숙소에 딸린 그들 식당이었다.

 

밥과 거친 요리를 내어왔는데 먹으라고 권하는게 아닌가? 졸지에 나는 중국 인민해방군 병사와 겸상을 하게 되었다. 내 배가 고팠으니 밥맛은 꿀맛이었다. 식사를 끝내고는 다시 차를 얻어 마셨고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살다가 살다가 별별 경험을 다 해본다. 한국 전쟁때 우리나라 통일을 결정적으로 훼방놓은 중국 인민해방군에게서 밥을 얻어먹을 줄 어찌 생각이나 하고 살았으랴? 

 

저번에 옥룡설산을 다녀왔을때는 주차장에 도착해서 걸어서 산을 올랐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옥룡설산 주차장에서 부터 말을 타거나 삭도(=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지만 나는 거의 한시간 가량을 걸어서 올라갔었다. 머리 위로는 삭도를 탄 사람들이 지나가고 나는 밑에서 손을 흔들고......

 

산 위에서 보면 멀리 사방을 둘러싼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들을 볼 수가 있다. 시내에서 보면 단순하게 보이지만 막상 산을 오르면서 보면 그 규모가 정말 장대함을 알 수 있다. 설산까지 가는 길목에는 백수대를 비롯하여 운삼평 같은 명소를 볼 수 있는데 혼자 보기에는 정말 아까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삭도 도착장에 이르면 그냥 내려가지 말고 정상 쪽 위로 난 잔도를 따라서 걸어보기를 권한다. 산 위에 자리잡은 천연 목장에는 야크와 말들이 노닐고 야생화가 사방천지에 가득하여 눈을 뗄수 없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약간은 상업화가 되었지만 소수민족 아가씨들이 자기들 고유의 복장을 하고 불러주는 노래 또한 들어볼만 하다. 그들의 애절한 가락은 나그네로 하여금 묘한 향수를 불러 일으켜주므로....

 

 

 

 옥룡설산! 중국인들이 손에 꼽는 명산이기도 한데 나는 이번의 여행때 올라가보지 않았으니 아쉬움만 가득히 남는다. 내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따라 올라갈 걸 그랬나보다. 사진에 보이는 녀석이 바로 야크(모우 毛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