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래카 해협은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영토인 수마트라 섬 사이에 자리잡은 해협이다. 아프리카, 유럽 및 동남부 아시아와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지 중의 요지다. 그리스 역사로 치면 트로이가 차지한 위치 정도이고 서양사에서 이스탄불이 차지하고 있는 정도의 지정학적 요충지 위치에 있는 해협이다.
여기를 봉쇄하면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목을 움켜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 처지가 된다. 석유라는 에너지 자원의 수입량 절대량이 말래카 해협을 통과해서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해협은 오래전부터 문명 전파의 길목이었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말레이시아 반도에서 인간이 삶의 흔적을 보인 것은 약 6000년 전부터라고 한다. 그러다가 기원 전후시기에 말래카 해협은 인도문명의 영향권 속으로 편입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현재도 말레이지아 인구의 10퍼센트 정도는 인도인 혈통을 지니고 있다.
16,17세기에 접어들면 유럽에는 대항해의 시대가 펼쳐진다. 향신료와 황금을 찾아 새로운 곳을 찾아 떠돌던 유럽인들에게 향신료가 풍부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지방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배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배에 이어 유럽 여러나라의 배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말래카 해협은 순식간에 국제적인 관심지역이 되었고 열강의 각축장이 되기 시작했다.
지도출처 : http://blog.naver.com/iqzero76/140013343451
지도를 펴고 살펴보면 말래카는 타이와 캄보디아, 자바와 수마트라,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요충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말래카는 이런 기막힌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싱가포르에서 북쪽으로 약 200여 킬로미터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에 나타난 시기는 의외로 한참 뒤쳐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400년대 초반에 이르서서야 드디어 말래카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다. 그러니까 알고보면 말래카의 역사는 일천한 것이다. 우리나라 경주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얕은 역사를 가진 지방이다.
하지만 방문객 수로는 비교가 안될 정도이니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내가 만나본 많은 서양인 가운데 말래카를 아는 사람들은 많았어도 경주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물론 말래카가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인 위상은 충분히 안다. 정상적으로 지리나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경주보다는 말래카라는 지명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훨씬 높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사실을 충분히 고려한다 치더라도 경주의 지명도가 현저히 낮은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왜 그럴까? 이유는 여러가지로 많을 것이다. 중국 운남성 리지앙(=려강)을 가보면 전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 오지 도시에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까닭이 무엇일까?
확실히 우리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 문제점을 우리는 모르고 있는데 외국인들은 너무 잘 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우린 찾아오는 관광객들까지도 쫒아내는 사람들이다.
바가지 요금으로, 불친절한 언행으로, 정치적인 이유로, 하여튼 갖가지 사건으로 찾아오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조차 없애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2005년 11월 11일 베이징 올림픽 개최 1000일을 앞두고 중국에서는 대대적인 행사를 가졌던 모양이다. 그때 크게 소개된 사람이 정화(鄭和)이다. 왜냐하면 정화의 남해원정 600주년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정화는 1405년 대규모의 원정대를 조직하고 그해 7월 11일 중국을 출발하여 오늘날의 말래카 해협을 통과한 뒤 인도양과 홍해를 건너 멀리 아프리카 동부 해안까지 다녀왔다. 그는 가는 곳마다 명(明)이라는 나라를 알리고 자그마한 나라들에게 명나라 문물의 우월성을 알리면서 조공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크리스토퍼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거의 90여년을 앞서는 엄청난 업적이었던 셈이다.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이 1492년의 일이니까 대강 계산해보면 알 것이다. 조선의 건국은 1392년의 일이었다.
<정화의 초상>
우리가 한반도에 매달려 아옹다옹거리고 있는 동안 중국인들은 대선단을 조직하여 엄청난 모험길에 나섰던 것이다. 정화의 웅대한 구상을 이어받아 중국인들이 먼저 대항해시대의 문을 열었더라면 지금쯤은 오늘날의 미국이나 영국이 차지했던 지위를 중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리라.
정화는 28년 동안 무려 7차례나 항해길에 나섰는데 모두 37개 국가를 방문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놀라운 일은 정화의 함대를 구성한 배들은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의 산타마리아호보다 성능과 규모면에서 훨씬 앞섰는데 특히 배길이는 유럽 배들의 2배나 되었다고 하니 할말을 잃을 지경이다.
이 정화의 함대가 두 번이나 말래카를 방문하여 중국이 조공을 받는 대가로 당시로서는 도시 국가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말래카의 후견인이 되었던 것이다. 말래카는 그런 곳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였다는 의미도 된다. 위에 보이는 지도는 유럽인들이 작성한 지도다. 한눈에 보아도 말래카의 전략적인 중요성이 단번에 드러난다.
나중에 명, 청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그게 자산이 되어 오늘날에 와서 화교 세력의 성장이라는 놀라운 사건의 밑받침이 되었던 것이다.말이 난 김에 약간 허황한 소리를 하나 해보자.
이글을 읽어보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나를 보고 "맛이 가버린 또라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는 일이지만 욕 얻어 먹을 각오를 하고 공상소설같은 이야기를 하나 꺼내보는 것이다.
요즘 몽골인들 가운데 우리나라를 환상의 국가로 생각하여 상당히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몽골이란 나라의 자연 환경이 거칠고 조악하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이지만 그런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몽골에다가 공장을 짓고 우리나라 기술자들과 인력들이 진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몽골은 면적으로 따지자면 남북한 합한 것의 7배, 인구는 약 300만 정도이므로 우리 남한 인구의 15분의 1이다.
우리나라 사람 300만명만 가서 살면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문제는 300만명이 몽골 정부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어떤 식으로 이민(혹은 거주)을 가며 어떻게 먹고 사느냐 하는 것이지만 치밀한 계획만 세우면 한 50년 뒤에는 우리 국토를 충분히 늘릴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한 뒤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최소한도 영어를 쓴다는 동질감은 남아 있는 것 아닌가? 국가 경영이란 것이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똑따먹기식 경영인가?
사무엘 헌팅튼 교수의 "문명의 충돌"을 보면 현시대에서 이슬람의 발흥 원인 가운데 하나(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했음을 기억하시기 바란다)로 이슬람 국가들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들고 있기도 하다.
예전에는 둘만 낳아 잘기르자라고 하던 슬로건이 이제는 바뀌어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예전부터 우리 인구가 1억은 되어야 된다고 주장해왔었다. 우리 처지와 지정학적인 위치를 보면 그 정도는 되어야 일본이나 중국과 겨룰 수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말래카에는 화인(華人 중국인)들이 많다. 말레이지아 인구 가운데 화인은 지금 전체 인구 가운데 자그마치 36%를 차지하여 약 50%를 차지하는 말레이인들과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상황에 와 있다.
말래카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동남아의 다른 화교들과는 달리 말레이 원주민들과 결혼도하고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여 지금은 '말래칸 차이니즈' 라고 불리고 있고 한때는 바바논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말래카는 15세기부터 회교(=이슬람교)의 동남아 전파에 앞장서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파키스탄과 아랍 장사꾼들이 퍼뜨리기 시작한 회교는 여기를 근거지로 하여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이시아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1511년 말래카는 떠오르는 해양세력었던 포르투갈에 점령된다. 포르투갈은 이 항구에 요새를 건설하여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포르투갈이 말래카를 지배하고 있을 때 말래카는 전성기를 맞았다. 이 때 인구가 약 2만명 정도가 되었다는데 이런 세력을 근거로 하여 예수 교단의 프란시스 자비엘(=사비에르)는 인도와 일본 및 중국에 선교활동을 했던 것이다.
다시 1641년 이번에는 네덜란드가 이 도시국가를 점령한 뒤 포르투갈 세력을 추방한다. 이 와중에서 말래카는 극도로 황폐화 되었고 인구도 격감하여 황금기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1795년엔 영국이 말래카를 차지한다. 영국은 말래카 해협의 북쪽 항구인 페낭 섬과 싱가포르 섬이 가지고 있는 전략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고 무력을 사용하여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인들의 유연하고도 창의적인 전략적 사고방식이 놀랍기만 하다.
세계 제2차 대전때 일본군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점령한 것은 이 말래카 해협과 말레이지아가 가진 전략적인 가치를 충분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니 일본인들의 안목도 보통은 아닌 것이다.
우리도 이젠 이 정도는 알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제 자동차들이 활개를 치는 말래카에서 우리나라 자동차를 한대 보니 왜 그리 반갑던지..............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