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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5 유럽 남동부-지중해,흑해까지(完)

루마니아, 로메이니어 7

by 깜쌤 2006. 3. 6.

지붕의 경사도가 너무 가파르게 보여서 현기증이 났다. 이곳의 겨울 기후가 어떤지 알 도리가 없지만 눈이 많이 내리는 지방이라면 이런 경사도를 가지는게 당연하지 싶다.

 

 

창문 사이로 내다보는 풍광은 확실히 목가적이다. 처음 버스에서 내려서 과수원 나무 사이로 바라본 경치를 상상하면 맞지 싶다. 저 밑에서 올려다 본 경치가 이젠 이해가 된다.

 

 

소파와 의자가 상당히 감각적이다. 영주들은 이 정도의 호사를 누리고 살았던 모양이다.

 

 

침대와 카펫의 모습이다. 겨울 난방을 벽난로 하나로만 했다면 상당히 추웠으리라.....   확실히 우리 조상들이 개발해서 사용한 온돌이라는 난방 시스템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발명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옛날에 온돌을 사용한 난방 시스템은 2층 이상의 건물에서는 사용하기가 불가능했으리라. 2층 이상의 옛 건물에 온돌을 사용한 전례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었다면 엄청나게 귀중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이런 모습의 벽난로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옆에 놓여진 두꺼운 나무 판자는 의자로 쓰였을까 아니면 침대로 사용되었을까?  벽을 보면 도자기들이 한 두점 보일 것이다. 저런 모양의 도자기는 유럽 스타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녀석의 정체는?

 

 

마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주 바뀌는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나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브란성에는 관광객들이 꾸준히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이젠 우물터가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여기저기 출입구가 나 있어서 처음 보시는 분은 미로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루마니아 산골짜기에서 청나라 강희제 시대의 도자기를 본다는 것은 놀라운 충격이다. 강희제는 청나라의 네번째 황제로서 황제자리에만 자그마치 61년간이나 꿰차고 있었던 인물이니 대단한 양반이다. 1661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산골짜기에 강희제 때의 도자기가 흘러들어와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당시 유럽인들에게 중국산 도자기는 최고의 사치 상품이었다고 전해진다. 지방의 시시한 영주라도 중국산 도자기 한두점은 가지고 있어야 얼굴 좀 들고 살 수 있었던 모양이다.

 

중국산 도자기는 그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그러길래 루마니아 지방의 영주 나으리도 바싼 돈 들여 도자기를 구해 보물처럼 아끼며 사용했던 것이리라.

 

터키 이스탄불의 톱카피 궁전에는 상상을 넘는 거대한 도자기 박물관이 있다.나중에 소개할 예정이지만 나는 거기에서 두눈 부릅뜨고 국산 도자기를 찾아 나섰다. 결과는? 실망스럽게도 국산도자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산 도자기들은 그득했는데 말이다. 지금부터 100년전, 200년전의 터키 제국이라면 유럽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은 초강대국이다. 터키의 지배자인 술탄은 오늘날의 강대국 대통령과 같은 존재였으므로 호사스러움과 사치는 상상을 넘을 정도가 아니었던가?

 

술탄들은 거금을 들여 도자기를 수집하고 사모았다. 그들이 선호한 물건은 중국산 도자기였다. 물론 일본산 도자기들도 섞여있다. 우리가 그렇게 자랑하는 청자와 백자는 왜 그들의 수집 대상 품목에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

 

 

1794년의 작품인지 1294년의 작품인지 모르지만 유럽산 그릇들은 동양의 도자기들에게 비하면 확실히 하류품들이다. 요즘 우리가 중국산 취급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다.

 

 

착잡한 기분을 안고 돌아서고 만다. 앞으로 삼사백년이 지나면 또 다시 우리 시대의 생활상을 모아놓은 박물관들이 등장할 것이다. 이때 유럽 시골마을에서 삼성, 엘지, 현대회사의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그 지방을 여행하는 우리 후손들이 느끼는 감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일본 제품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면 그 느낌은 또 어떤 것일까?  

 

 

이치로라는 녀석이 있다. 야구에 관한 집념과 안타를 때리는 실력 하나는 세계적이어서 미국 프로야구에서도 연간 최다안타 기록을 수립한 괴물같은 녀석이다. 그 인간이 '앞으로 30년간은 일본을 이길 수 없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큰소리 쳤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나는 이치로의 망발을 기억해서 교직에서 물러나는 순간까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그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나라가 작다고 해서 국민 정신까지 작으면 곤란해진다.

 

여기 이 골짜기에서 일제 도자기를 발견했더라면 피를 토하는 심정이 되었으리라. 이런 산골짜기에 우리 한국제 물건이 쏟아져 나오는 그런 날이 속히 오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아까 위에서 보았던 우물의 조각 장식품 모습이 아주 정교했다. 우물 위에는 도르레를 장치하여 물을 쉽게 길도록 했으리라. 이제 우리 아이들은 '물을 길다'라는 그런 표현을 잘 모르지 싶다. 물을 길어본 경험이 없으니 낱말을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바위위에 붙어 선 브란 성은 괴기스럽다는 느낌보다는 정겨운 느낌이 앞섰다.

 

 

브란성을 나와서 입구 앞쪽 바위 위에 올라섰다. 성 속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발 밑에 보인다. 시간이 더 풍족했다면 브란성 앞쪽의 산에 올라가 보았으리라.

 

 

성을 나온 우리들은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오지 않고 내부에 자리잡은 민속시장과 민가를 방문해 보기로 했다. 작은 민속촌을 생각하시면 된다. 난전이 여러개 자리잡았는데 지저분하질 않고 상당히 깔끔했다.

 

루마니아 방문 기념으로 뭘 하나 구해야 하는데 무엇을 사야할지 모르겠다. 나는 아주 작은 소품들을 사모은다. 돈이 없으므로 아주 작은 것들이나 헐한 것들을 사는 편이다.

 

 

민속 의상을 입은 이 소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 소녀에게서 뭘 하나 살까말까 망설였다. 결국 나는 차받침 천을 한장 샀다. 예전 돈으로 거금 6만레이를 주었으니까 우리돈으로 치면 한 1,900원짜리 물건이 되리라.

 

 

성화도 있었는데 가격이 아주 조금 비싸고 가지고 다니기가 불편해서 안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후회스럽다.

 

 

이런 가옥들이 루마니아 전통 집들인 모양이다. 벽은 희게 칠했고 나무 조각을 잘게 잘라 지붕을 얹은 것 같다. 우리도 예전에 벽에 회칠을 했었다. 

 

 

 

난전의 모습이다. 간이 천막을 길 양쪽으로 쳐서 너절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했다.

 

 

단정하게 가꾸어진 잔디 위에 자리잡은 전통 가옥이 여름 햇살을 맞아 숲 속에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다가 왔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