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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옛날의 금잔디 Long Long Ago (고향)

발을 삶다

by 깜쌤 2005. 6. 21.

발 ( 足 )

 

소년은 토요일이면 특별히 신이 났다. 지겨운 학교 공부에서 조금이나마 일찍 해방되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토요일 오후 시간은 일요일보다 더욱 신이 나고 좋았다. 일요일이라는 시간이 뒤에 버텨주고 있기 때문에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책가방이 귀하던 시절이라 책은 모두들 보자기에 싸서 다녔다. 교과서 달랑 몇 권에 허름한 누런 갱지로 된 공책 서너 권에다가 나무로 만든 연필통 속에 몽당연필 두 자루 자리잡게 하고 책보자기 한가운데 놓고서는 그냥 묶으면 된다.


 그 놈을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 밑으로 사냥꾼들 꿩 총 매듯이 비스듬하게 척 걸치고는 매듭을 앞쪽에 오게 하여 매고는 닳아빠진 헌 고무신 꿰어차고 달음박질치면 시골 촌놈 하교길이 완성되는 것이다.

 
<소년이 살던 고향마을 뒷산은 흉물스럽게 잘려나가버리고 그 와중에 산밑에 자리잡은 동네도 사라져 버렸다 - 친구가 찍은 사진을 빌려왔다>

 

여학생들은 그 책보자기를 허리 뒤로 얌전하게 묶어 다녔다. 아기 업듯이 엉덩이 위에 착 걸치면 멋진 모습이 된다. 남학생들은 어깨에 매기도 했는데 책 부피가 적은 토요일이면 책이 등뒤로 가도록, 마치 스님들이 바랑 매듯이 걸쳐서 새로운 뉴 패션 책보자기 기법으로 멋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는 가벼운 몸을 추스리며 집을 향해 뛰는 것이다.

 

집에 빨리 갈수록 보리밥이나마 많이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위로 둘이나 있는 누나가 오기 전에, 밑으로 셋이나 되는 남동생들이 오기 전에 먼저 가야한다. 수업 시간이 적은 동생이 미리 집에 갔을 터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만 했다. 사실 누나와 같이 다녀도 되지만 그래도 남자라고 여자들을 깔보던 그 무엇이 있어서 먼저 뛰어오곤 했던 것인데 꾸중은 꼭 누나가 들어야만 했다.


 "쯧쯧, 동생도 못 챙기는 것이 무슨 누나라고?"


 어머니는 소년을 꾸중하시지 않고 꼭 애꿎은 누이를 나무라곤 하셨다. 집에 오니 아무도 보이질 않는데 부엌에 걸린 시커먼 무쇠 솥에선 하얀 김이 칙칙 숨가쁜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소년은 일단 책보자기를 벗어 윗목 구석에 얌전히 자리잡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 정리해두었다.

 

없는 살림이지만 책상 하나는 신주 모시듯 하며 귀하게 여기던 집안인지라 보자기를 풀어 책을 정리해 두어야만 했다. 그런 뒤 밥을 찾아 먹어야 한다.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니 소년이 찾아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초겨울인지라 밥은 아랫목 이불 밑 보자기 속에 곱게 모셔져 있을 것이지만 그날 따라 이불 밑에 있어야 할 밥그릇이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밥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김을 내는 솥 안에 있을 것이다.  

         
 부엌으로 나가기가 싫어진 소년은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에 걸치고 앉아서는 오른쪽 발을 사알살 내밀어 솥뚜껑을 열어보려는 꾀를 냈다. 쫄라당 미끄러지기도 하는 날엔 솥에 발을 빠뜨려야 하는 대형사건이 생기는 것이지만 4학년 소년의 머리엔 그런 안전의식이 없었다.


 그렇게 하여 솥뚜껑을 여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그와 동시에 소년의 오른발이 펄펄 끓는 가마솥 속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온 몸을 비트는 듯한 고통이 오자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발을 빼냈다. 하지만 때가 늦었다. 소년의 오른쪽 발목이 뜨거운 물에 푸욱 삶기고 만 것이다.


 소년은 고통스런 비명을 질러댔고 동네 우물에 물을 길러 가셨던 어머니께서 집에 달려왔을 땐 이미 일은 벌어지고 난 뒤였다. 곧 이어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고 임시 치료를 위해 소년의 양말을 벗기려고 했다. 그러자 툭툭한 무명 양말이 익어버린 소년의 피부와 함께 벗겨지기 시작하자 어느 누구도 감히 더 이상 나서지를 못했다.


 누구는 읍내에 있는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떠들어댔고, 누구는 그 동안 익은 부위에 된장을 발라야 한다고 했고, 이럴 때는 간장을 바르면 좋다고 우기기도 했다. 그래서 경험 많은 동네 할머니의 의견을 따라 화상 입은 상처 부위에 간장을 한 종지 부어 놓았다.

 

 발라 놓는 다고 한 것이지만 솜이 귀하던 시절이니 그냥 들이부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랬더니 소금기 때문에 더욱 따갑고 아프기만 한 것이어서 소년은 거의 까무러칠 정도가 되었다.


 읍내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만 하는데 하루에 한 두 번 오는 버스는 마을 뒤산 고개를 넘어가야 탈 수 있었다. 천만 다행으로 하루에 서너 번 지나가는 완행 열차가 올 시간이어서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들쳐 엎고는 역으로 냅다 달렸다.

 


             <소년이 살았던 산골엔 이젠 이런 기차가 다닌다 - 고향친구가 찍은 사진임>


 사람으로 만원인 기차 안에서도 소년은 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고통 때문에 울기만 했다. 다리를 못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그냥 고통 때문에만 울었다. 주위에 둘러서서 안쓰럽게 여기던 사람들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왔고 어머니는 계속 울먹이기만 하셨다.

 

그러다가 어떤 양복 입은 신사가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상처에 만년필 잉크를 발라보자고 하셨다.


 간장에다가 만년필 잉크까지 바른 소년이 기억하는 것은 한없이 따뜻했던 의사 선생님의 자상한 눈빛과 가위로 피부를 썩둑썩둑 잘라내던 모습뿐이다. 어떻게 치료를 받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 이후로 소년은 자주 어머니의 눈에 어리는 물기를 볼 수 있었다. 애써 눈물을 보이시지는 않으셨지만 소년이 붕대 감은 다리를 앞으로 쫘악 펴고 혼자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읽을 때마다, 학교 갔던 옆집 친구 규환이가 놀러와서 학교 이야기를 할 때면 어머니 눈에 어리던 물기를 훔쳐 볼 수 있었다. 


 총기가 넘친다고 해서 그래도 시골 동네에서는 용하다는 소리를 듣던 소년이 한달 간씩이나 학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글프셨던 모양이었다. 그것보다는 어쩌면 소년의 어머니께선 집안을 일으켜 세워줄 소중한 아들이 정상적으로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더 마음 아파 하셨으리라.   
         

 

###   

 

전방 GP 총기난사 사건으로 소중한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의 찢어지는 그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지....  어떻게 위로해드려야 할지........   어제 저녁 집사람이 사고현장 부근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제대한 뒤 복학한 아들녀석에게 전화를 했단다.

 

"에이, 엄마. 그 정도 소리는 보통으로 듣고 살아요. 뭘 그런 걸 가지고.... 나도 그런 정도의 욕은 많이 들었어요."

 

자식 둔 부모 마음을 젊은 친구들이 얼마나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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