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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옛날의 금잔디 Long Long Ago (고향)

땡감을 찾아서

by 깜쌤 2005. 6. 17.

 

                                                    땡감

 

 


                    <그 많던 감나무도 다 사라져 버리고.....>

 

놀노리한 감꽃이 떨어질 때면 재빨리 감나무 밑으로 쫓아가야 한다. 친구들 보다 하여튼 먼저 찾아가야 한다. 감꽃이 시도 때도 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막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간밤에 바람이 심하게 불었던 날이나 비바람이 불 때를 잘 맞춰 가야 친구들 보다 먼저 주워먹을 수 있는 것이다.

 

 입에 넣고 씹으면 떨떠름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게 맛있어서 감꽃 피는 계절이면 날마다 감나무 밑에 가서 감꽃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사실 감꽃 보다 맛있는 게 비 온 뒤에 쑥쑥 빠져 떨어진 땡감이다. 장마철이면 땡감이 그냥 떨어져 내린다. 아직도 푸릇푸릇한 풋내가 가득한 퍼런 감을 주워 한 입 베어 물면 그 맛은 거의 고문에 가까운 떫은맛이 우러나와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쓰게 되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떫은맛을 없애기 위해 맑은 물이 흐르는 모래 속에 며칠 묻어두었다가 꺼내 먹으면 달콤한 맛이 스며 나와 환상적인 간식이 되는 것이다.


 감에도 종류가 있어서 단감과 떫은감이 있는데 우리나라 중부지방 이상에서는 단감 재배가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동네에는 단감이 귀했다. 따라서 눈에 띄는 것은 거의 떫은감인데 장마철에 빠지는 땡감조차 귀하긴 매일반이었다.

 

 

 

 


 

 요즘 같으면 개도 안 물고 갈 땡감이지만 배고픈 어린아이들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간식이었기에 감 주우러 가는 것도 즐거운 일 중의 하나였다.


 그렇지만 우리 동네엔 감나무가 흔하지를 못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강 건너 내성천이 물 돌아나가는 건너 마을까지 원정을 가야했다. 학교를 일찍 파한 초여름부터 감을 줍기 위해 강 건너 마을에 자주 갔다.

 

감나무는 보리밭이 있는 밭둑 부근에 터를 잡은 경우가 많아서 보리밭 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동네 꼬마들의 출입을 막았다. 다 익은 보리밭이나 이제 막 자라나는 콩밭 사이로 꼬마들이 돌아다니며 보리나 콩 줄기를 부러뜨려 놓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꼬마들도 주인의 눈치를 잘 살펴야 했다. 어떨 땐 사나운 개를 감나무 밑에 매어두는 경우도 있어서 멍멍이에게도 신경 써야 했다. 인심이 후하던 시절의 이야기라 고약한 개 주인을 만나 개에게 쫓겨다닌 기억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미친개가 막 돌아다니던 일도 있었기에 침을 질질 흘리고 눈에 퍼런 기가 번뜩이는 검은 개는 때때로 우리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긴 팔 러닝셔츠가 잠옷 겸 외출복 겸 체육복이던 시절이라 감을 주워 담을 주머니가 마땅찮았다. 요즘 흔해빠진 비닐 주머니는 구경조차 해보질 못했다. 검은 천으로 만든 반바지 한 장으로 삼복 더위를 보냈으니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어보는 것도 어린 시절의 작은 꿈이기도 했다.

 

그러니 러닝 셔츠를 반바지 속으로 밀어 넣고 헝겊 끈으로 허리 부분을 질끈 묶고는 보리밭이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감을 주워 목 부분으로 밀어 넣으면 감이 배 주위와 옆구리, 뒤 등판 사이를 막 돌아다니게 마련이었다.


 그러다가 땡감 물이라도 묻으면 여름 내내 지워지지 않는 것이어서 얼룩진 셔츠로 다녀야 했지만 땡감 사냥에 성공했다는 혁혁한 전과를 자랑스레 증명하는 훈장정도로 생각하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다. 다만 어머니에게 혼나는 것이 탈이긴 했지만.....


 주워 놓은 감은 일단 강물이 얕게 흐르는 모래바닥 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물이 발목정도까지 흐르는 얕은 곳을 골라서는 모래를 판다. 그런 뒤 떫은 맛 가득한 땡감을 모래 속에 가지런히 박아두고 모래를 덮어야 한다. 이틀이나 사흘 뒤에 찾으러 오는데 표시를 해두지 않으면 영영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자기만이 아는 표지를 해두어야 했다.


 그 표식이라는 게 그냥 작은 꼬챙이 하나만 땡감 묻은 모래 위에 달랑 꽂아두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 생각이란 것이 참 순진한 것이어서 그 꼬챙이가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면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처음엔 몰랐다.

 

동네엔 놀부 심보를 가진 친구가 꼭 한둘 정도 끼어 있어서 남들이 다 모래 속에 감을 묻어두고 가버리면 뒤에 남아 노는 척 하다가는 친구들의 표지를 다 없애버리고 자기 막대기를 대신 꽂아 두기도 했다.


 그러면 며칠 뒤에 아이들 사이에 큰 다툼이 생기곤 했다. 더 아쉬운 것은 내 표식으로 세워둔 막대기가 큰물지면서 떠내려가 땡감을 찾지 못하는 경우였다. 그래서 소년에겐 밤에 내리는 큰비가 항상 걱정거리로 다가왔다. 잃어버린 내 간식이 배고픔보다 더 큰 슬픔으로  다가 왔던 것이다.  


 어제 밤엔 땡감 묻는 꿈을 꾸었다. 머리가 허옇게 세어 오십 줄에 접어들었는데도 왜 그런 꿈이 꾸어지는지 모르겠다. 잃어버린 내 몫에 대한 아쉬움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가득하기 때문인가 보다. 아니면 남의 감을 훔쳐먹은 동무들이 변비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보며 고소해하던 못난이 심보를 아직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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