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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을이 숨어있었다니 - 선원마을 4

by 깜쌤 2021. 1. 25.

 

연정 고택 옆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어.

 

 

 

 

그랬더니 새로운 집들이 등장하는 것이었어. 쓰러져 가는 폐가도 나타났는데 마음이 아려왔어. 저런 공간도 한때는 어느 누구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을 텐데 말이지. 

 

 

 

 

큰 마당을 지닌 집으로 들어섰는데 트럭을 몰고 외출 나가시려던 주인어른께서 기꺼이 구경하기를 허락해주셨어. 

 

 

 

 

멋진 집이었어. 이 집도 규모가 컸어. 우선 한눈에 보기에도 세 채의 기와집이 쭉 늘어서 있으니까 그런 느낌이 들지 않겠어?

 

 

 

 

대문은 우리가 들어섰던 그쪽이 아니었던 거야. 마당 한쪽 옆에 화장실 비슷한 공간이 보였어.

 

 

 

 

오른쪽 공간이 본채인 것 같았어. 

 

 

 

 

본채에 붙은 아궁이가 보이지? 문을 유심히 보아둘 필요가 있어.

 

 

 

 

창호지를 바른 속 문 바깥에 유리를 댄 덧문이 하나 더 붙어있지? 

 

 

 

 

아궁이 위에 걸린 가마솥이 기름으로 닦아놓아서 그런지 반질반질했어. 안주인의 정성이 보통 넘는다는 말이겠지? 유리라는 물건이 이천 년 전에 이미 로마제국에서 사용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신라 왕실에서도 유리 제품을 사용했다는 증거들이 많아. 출토된 유물이 그걸 증명한다니까. 

 

 

 

 

대청마루 상태도 아주 정갈했어. 겨울 날씨에 이 정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안주인과 바깥어른이 그만큼 부지런하다는 증거가 되는 거지. 

 

 

 

 

본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쪽문 크기도 보통이 넘는 것이었어. 나는 그 너머 공간이 너무 궁금했던 거야. 문지방을 넘어 거기를 들어서는 순간, 나는 너무 놀라버렸어.

 

 

 

 

장독대의 크기만 해도 어느 시골집 마당 크기였던 거야. 

 

 

 

 

그것뿐이라면 놀랐다는 표현을 왜 쓰겠어? 뒷간에 펼쳐진 공간이 어마 무시했던 것이었어. 세상 살아오다가 이런 집은 처음 만나보는 것 같았어. 

 

 

 

 

안주인은 뒷간에 펼쳐진 밭 끝머리에서 일하고 계셨어. 

 

 

 

 

장독대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문이 따로 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이 집에 출입했던 손님들 숫자와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일가들과 하인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싶어. 

 

 

 

 

이제 대문이 보이네. 사랑채 밑으로 이어진 또 다른 기와집이 보이지? 그 공간을 보면서도 나는 한번 더 놀랐다는 거 아니겠어?

 

 

 

 

별채에는 천고학당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었어. 가정집에 이런 현판이 붙어있다는 것은 여기 이 공간이 서당이었거나 주인이 공부하던 곳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겠지.

 

 

 

 

대문의 규모를 봐 둘 필요가 있어. 대문 곁에 딸린 방과 창고를 보면 이 집이 가진 부의 규모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뒷밭에서 일하시는 안주인의 허락을 얻어 천고학당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어.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천고학당이 있는 건물이야. 이제 대강 구조가 이해되지?

 

 

 

 

겨울이니 신발을 신고 들어가라고 하셨어. 세 칸 규모의 방이었는데 모두 연결되어 있었어. 

 

 

 

 

이 집 천장의 모습이 아주 특이했어.

 

 

 

 

표구로 만들어진 것들은 가솔들의 작품이겠지?

 

 

 

 

마지막 방은 마루로 만들어져 있었어. 그렇다면 그 공간이 서당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싶어. 

 

 

 

 

나중에 주인 말씀을 들어보니 선조 어른께서 여길 서당으로 쓰셨다는 것이었어. 서당 공부를 끝낸 아이들은 서원으로 갔고 그런 뒤에는 향교 출입을 하며 학문을 익혔다고 하셨어.

 

 

 

 

명문세가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어.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말이 거저 만들어진 말이 아님을 깨달았어.

 

 

 

 

서당으로 사용되었던 천고학당의 내부를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내가 평생을 두고 걸어온 길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야. 

 

 

 

 

사실 나도 학문의 길을 걷고 싶었는데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인생 마감할 때를 맞은 거야.

 

 

 

 

이 집 주인어른이 출입할 때 쓰는 트럭이야. 

 

 

 

 

트럭이 세워져 있는 곳이 원래 대문터가 아니고.....

 

 

 

 

대문은 이쪽이었던 거야. 

 

 

 

 

선조 삼 형제가 이 동네에서 살았다는 거야. 뒷마당의 규모가 정말 광대했어. 

 

 

 

 

우린 그 집을 나와서 바로 뒷집으로 갔어. 삼형제 중에서 큰집이 된다는 곳이지. 

 

 

 

 

제일 앞쪽 집에 송죽헌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었어. 

 

 

 

 

본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잠겨 있었어.

 

 

 

 

바로 앞에 보이는 집이 서당이 있던 집이야. 

 

 

 

 

시골 가정집에 이런 현판이 붙어 있을 정도라면 보통 집안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송죽헌의 유래를 한자로 기록해두었어. 

 

 

 

 

나는 툇마루 끝에서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보았어. 외부인인 내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지만 대강의 분위기는 파악해 볼 수 있지 않겠어?

 

 

 

 

우린 송죽헌을 나와 천고 서당을 품에 안은 앞집을 지나쳤어.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겠지?

 

 

 

 

천고학당 바로 앞집은 퇴락하고 있었어. 

 

 

 

 

기왓장은 떨어져 내려 깨어지고 있었고 부엌문은 뜯겨 나갔으며 회벽이 내려앉고 있었어.

 

 

 

 

우리 어머니들과 누이들, 그리고 할머니들의 애환이 묻어있는 공간들이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채 사그라들고 있었어. 

 

 

 

 

나같은 못난이의 아내도, 누이도 그런 식으로 고생을 했었지.

 

 

 

 

이 집의 택호는 사일댁이었던 모양이야. 택호라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알 수나 있을까?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서는 택호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어. 일부분만 가져와서 소개해드릴게. 

 

 

택호

 

우리의 전통사회 성원들은 성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명 대신 택호를 즐겨 사용하였다. 택호의 사용이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남자에 대한 성명 호칭의 기피에도 연유가 있겠으나, 그보다도 오랫동안 처가살이를 하는 혼인 풍속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택호는 귀속을 나타내는 것인데, 남자가 장가가서 처가살이하는 것을 ‘남귀여가(男歸女家)’라고 표현하였고, 여자가 시집가서 시집에서 사는 것을 ‘여귀남가(女歸男家)’라고 표현하였듯이 귀속 칭호의 잔존인 듯하기 때문이다. 택호로는 주로 그 집의 주부가 혼인하기 이전에 살던 동리 이름이 사용된다. 행정단위로서의 동리 이름보다는 자연촌락 이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부인이 ‘옥천’에서 시집왔다면 그 집을 ‘옥천 집’이라고 하고, 그들 부부를 각각 ‘옥천댁 아저씨’·‘옥천댁 아주머니’라고 부른다. 만일 이사를 가게 되면 전에 살던 곳의 지명이 택호가 되는 경우도 있다. 관직에 있었거나 또 있는 경우에는 관직명이 택호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였다면 그것이 택호가 되어 ‘진사 댁’이라고 불린다. 때로는 유명하였던 조상의 시호가 택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출처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9135

 

택호

성명 대신 집주인의 벼슬 이름이나 처가나 본인의 고향 이름 등을 붙여 그 집을 가리키는 호칭. 우리의 전통사회 성원들은 성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명 대신 택호를 즐겨 사용하였다.

100.daum.net

 

 

나는 아련해진 마음을 부여안고 사일댁을 슬그머니 물러나왔던 거야. 

 

 

 

 

사일댁 후손들은 어디로 가셨을까?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