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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9 유럽-동남부:발칸반도 여러나라(完

크노소스 궁전까지 걸어갔어

by 깜쌤 2019. 12. 17.


구글 위성지도를 가지고 이라클리온 시를 한번만이라도 훑어본다면 시가지 안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역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어.



우리는 지금 성벽으로 둘러싸인 시가지를 걸어가고 있는 중이야.



광장에 돌사자 분수가 있더라고. 그냥 척 봐도 베네치아 시대의 유물이란 것쯤은 알게 되잖아?



베네치아의 상징은 날개달린 사자였어.



이라클리온은 크레테 섬안에서 제일 가는 큰 도시야.



그러니 있을만한 시설은 다 있는 셈이지.



시가지를 벗어나 크노소스 유적지로 찾아가는 길은 의외로 간단했어. 


 

거의 직진만 하면 되는 길이었거든.


 

성벽이 나타났어. 베네치아가 크레타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만들어진 성벽이지. 아래 지도를 보기로 할까?





집이나 사무실에서 다음(DAUM) 포털에서 PC로 이 글을 볼 경우,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확대되어 뜰 거야. 진을 보면 시가지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어. 우리가 묵고 있는 레나 호텔도 표시되어 있지. 놓치지 말아야할 곳은 고고학 박물관의 위치야.  



성벽을 따라 안쪽으로 도로가 나있었어.



성벽에 마련된 터널을 걸어나갔어. 이 정도면 성벽이 엄청 두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서기 1648년 초여름에 당시 칸디아로 불렸던 이라클리온에 오스만 투르크의 육군이 밀려들었어. 


 

크레타 섬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지 4년째 되던 해였지. 성안에서 성을 지키던 수비병들은 약 6천명 정도였고 성을 공격하는 터키 군대의 수는 4만명에 이르렀어.



이 도시를 두고 자그마치 거의 삼십여년간이나 전투가 계속된 거야. 그만큼 베네치아의 저항이 극렬했고 터키측의 집념도 집요했던 거야. 다르게 말하면 그렇게 오래 버텨내야 할 정도로 크레타가 베네치아에게 중요했던 거지. 


 

유럽 여러 나라들은 처음 십여년동안 베네치아의 눈물겨운 저항을 그저 멀뚱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해. 


 

이 전쟁에 끼어든 유럽인들은 거의 다 용병이었거나 의용군이었다고 해. 


 

크레타 공방전이 벌어진지 23년째 되던 해인 1667년 5월에는 터키군이 총공격을 감행했어.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터키군은 굴을 파고 폭약을 묻어서 터뜨렸는데 그게 613개나 되었다고 해. 물론 포격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이루어졌지.  



그해 11월까지 베네치아 쪽에서는 3,600여 명에 이르는 전사자가 발생했는데 그중에 지휘관이 400여 명이나 되었나고 해.



터키군 전사자는 2만을 넘어섰다고 전하지. 칸디아(=이라클리온) 공방전에는 수류탄도 등장했어.



이정표를 보면 카니아라는 이름이 나오지? 하니아로도 알려져있어. 크레테 섬 서부에 위치한 도시인데 거기에서부터 터키군의 크레타 공격이 시작되었었지. 



1,668년, 그해 일년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이 칸디아 수비를 위해 지출한 전쟁비용이 439만 2천 두카토였다고 해. 두카토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금화야. 그해 베네치아의 세입이 300만 두카토였다고 하니까 그야말로 나라의 존망을 걸고 싸움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다음해인 1,669년은 이라클리온 공방전이 벌어진지 25년째가 되는 해였어. 터키군 병사들은 베네치아 수비군인을 두고 인간들이 아닌 유령들이 나서서 싸운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해.



칸디아, 그러니까 이라클리온 방위를 책임지고 있었던 지휘관은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라는 사나이였는데 지난 25년간 이곳에서 전투를 하느라고 결혼도 못하고 총각으로 늙어가고 있었다고 해. 스물다섯 나이에 전투에 참전하고나서 25년의 세월을 보낸거야.



꽃같은 청춘을 전투로 보내버린 거지.



1669년 9월 26일, 더 이상의 항전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모로시니를 비롯한 베네치아 군인들은 배를 타고 크레타를 떠났어. 터키인들 지배하에서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리스 사람들도 함께 배를 타고 떠났다지.



그로부터 14년 뒤인 1683년에 그는 베네치아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어. 


 

그가 지휘한 베네치아 해군은 터키군에게 뺏겼던 아드리아해의 많은 요충지들을 탈환하기 시작했어.



나중에는 그리스 본토에 진입하여 터키가 점령하고 있던 스파르타를 회복하고 아네테를 되찾았어.



당시 터키군은 아테네의 파르테논을 화약고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모로시니가 지휘하던 베네치아 군대가 쏜 대포알이 명중했던 거야. 



결과는?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웠던 페리클레스 역작은 세월이 흐르면서 약탈을 당하고 파괴되어 오기만 하다가 오늘날처럼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거야. 사진 속을 보면 먼 산봉우리에 눈이 보이지?


 

1688년 3월, 모로시니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수로 선출되었어. 원수로 선출되고 나서도 2년 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어. 그리고는 다시 전쟁터로 돌아간 거지.



1694년 그는 전쟁터에서 75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해.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분이지.

 


1714년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는 다시 에게해와 아드리아해로 몰려들었어. 국력과 인구면에서 터키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던 베네치아는 모로시니가 탈환했던 영토를 또 잃어버리기 시작했던 거야.



터키와 그리스, 터키와 베네치아와 그런 관계였어.



이야기를 하다보니 우리는 시가지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던 거야.



이런저런 구경을 해가며 걸었으니 지루하지 않았어.



한번씩은 우리나라 상표를 단 자동차를 만나기도 했지.



그러니 지루할 틈이 있었겠어?



마침내 시가지가 끝이 났어. 벌써 한시간 이상을 걸었던 거야.



병원 담장 밑에서 야생보리를 발견했어.



사이프러스 삼나무가 등장했고....



도로가에는 용설란도 자라고 있었어.


 

그러다가 올리브 농장을 만났어.



올리브 열매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지. 포도도 그렇고 말이야.



소변이 마려웠던 나는 눈치를 봐가며 올리브 나무 사이로 걸어들어갔어. 영화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보았는지 모르겠어. 무슨 영화인지 모르겠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해 봐. 손해볼 일은 없을 거야. 


https://blog.naver.com/sirun/221672778468  


 


시티 투어 버스도 지나갔어. 이제 거의 다 왔을 거야. 



소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곳도 있더라고.



춘양목을 보는 듯 했어.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어. 우리도 너무 무식하지?



뽕나무에는 오디가 가득 달려있었어.



내가 만나본 가장 큰 뽕나무는 터키의 에베소(=에페수스) 가는 길에서 만났던 나무들이었어.



이런 정도로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어.




주차장이 나타났어. 아래 지도를 봐.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나타낸 것이지. 지도를 확대해두고 보면 좋을 텐데.... 확대하는 방법은 저 위에서 이미 이야기 했어.



멀리 보이는 산비탈은 거의 다 올리브 농장이야. 



주차장이 아주 크더라고.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지만....



기념품 가게가 나타났지? 드디어 다 온 거야. 입장해서 빨리 쉬고 싶었어.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