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초등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우리나라 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라안 여기저기 in Korea

울진에서 영덕까지 4 - 덕구온천을 향하여

by 깜쌤 2019. 10. 2.


덕구온천을 향해 천천히 달리다보니 서원이 있다는 표지판이 나오는 거야.


 

서원이 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않겠어? 그래도 어설프나마 명색이 전직 교육자인데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된 자랑스러운 교육기관을 보고 그냥 지나친다면 어불성설 아니겠어?



월계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을 쉼터가 있었어. 월계서원은 얼마 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곳의 서원에 들어가는 곳은 아니야.



멀리 멋진 다리가 골짜기를 가로지르고 있었어.



아마 이건 곳집일 가능성이 높아. '물건을 보관하거나 쌓아두는 집'이 곳집이지만 주로 동네 장례식에 쓸 상여를 보관하곤 했어. 상여를 종이꽃같은 꽃으로 장식하면 꽃상여가 되는 거지.



그래서 예전 시골에선 젊은이들 사이에 밤에 곳집 안에 들어갔다가 돌아오기 같은 내기가 벌어지기도 했어. 


 

사내들의 담력을 시험해보는 놀이이자 내기였지.



골짜기 속에 월계서원이 숨어있었어.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더라고.



관리인 내외분을 만나 허락을 얻고 구경에 나섰어. 사당이 뒤에 있더라고.



담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어.



강당이야. 이런 마루에서는 주로 스승이 후학들을 가르쳤겠지.



월계서원에는 아주 특이하게 국보각이라는 건물이 있었어.



장양수라는 분의 홍패를 보관하고 있다는 건물이지.



고려시대에 과거에 합격한 분에게 내린 합격증이 홍패라고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그 홍패가 바로 이 건물 속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이겠지. 국보 제181호라고 해.



장양수라는 분은 지금부터 약 800여년 전 인물이라고 보면 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교지라고 해. 교지란 '임금이 신하에게 내렸던 공식적인 임명장' 정도로 보면 돼. 국보가 보관되어 있을 정도의 서원이라면 볼 만하다는 말 아니겠어?



참하지?



하늘이 정말 푸르렀어. 이런 것이 울진의 매력인 것 같아.



나는 다시 돌아나왔어. 큰 나무가 있는 곳이 아까 처음에 소개했던 마을 쉼터야.



나는 다시 덕구로 이어지는 도로로 나가서 라이딩을 시작했어.



덕구온천이 12킬로미터 정도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면 한시간 안에는 도착할 수 있다는 말이 되겠지.



그렇다면 서두를 필요가 없어. 천천히 가도 된다는 말이야.



현판이 네개나 붙어있는 건물을 만났어. 도고정사 겸 호계정이었어.



장대룡 장군은 어떤 분이시지? 궁금증이 일어났지만 참기로 했어.



그는 조선시대 임경업장군의 별장이었다고 전하는데 울진군지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를 소개하고 있다고 해.




장대룡 장군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호월리 무월동에서 출생하였다. 장대룡 장군은 조선시대 1618년(광해군 10)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판관 및 삼척척사와 경흥방어사를 지냈다. 1636년 병조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 아래 삼도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을 하고 세자와 삼학사를 볼모로 청나라로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대룡 장군은 불영사에서 수도 중인 힘센 승려 개남()과 의논하여 청나라 태종을 암살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자고 결심하고, 개남과 함께 말을 몰아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잠입하였다. 청 왕실의 궁 안을 살펴본 후에 궁중 화약고를 발견하고 이곳을 폭파하기로 결심하였다. 장대룡 장군은 자신의 의관을 벗어 타고 간 말의 등에 얹은 다음, 승려 개남을 말과 함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장대룡 장군은 어둠을 틈타 궁중 화약고를 폭파시켰지만 자신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해 화약과 함께 불타버렸다.

개남은 장대룡 장군의 의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장군이 입었던 의관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 사리곡 동쪽 왼쪽 기슭 산에 의관장()으로 매장하였다. 묘를 의관장할 때 마을 부근의 각 고을 수령들이 모여 치상을 하고 장사를 끝내자, 용마가 슬피 울다가 죽어버렸다. 사람들은 장군의 묘 북쪽에 말을 묻었는데, 이 무덤은 ‘의로운 말 무덤’이라고 전하였다. 그 후 승려 개남도 죽자 장군의 무덤 아래 쪽에 묻고 무덤을 ‘개남총’이라고 불렀다. 요즈음도 불교 신자들이 다녀가곤 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장대룡 장군과 개남총」 [張大龍將軍-介南塚]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18784&cid=51937&categoryId=54589




 

나는 정자에 앉아 배낭에 넣어온 음식을 꺼냈어.



물을 마시고 사과를 깨물었지. 임경업장군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 분의 별장이었던 장대룡 장군에 대해서는 몰라도 너무 몰랐어. 내가 가진 지식의 한계야.



설화로 그 분의 무용담이 전해지지만 실제 인물임에는 틀림없어.



울진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있어. 그래서 이런 시설물이 존재하는 거야.



정자를 나온 나는 배롱나무 꽃이 만발한 도로를 달렸어.

 


도로가 휘어지는 곳에는 붉게 물든 배롱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어.



도로 옆에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어.



이런 도로를 달리라고 누가 명한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달릴 수 있을 것 같아.



부구초등학교 삼당분교를 만났어.



부근에 십이령이라는 고개가 있는가봐.



십이령에 관해서는 텔레비전에서 한번 본 것 같아.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더라고.




십이령[ ]    

요약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봉화군으로 이어지는 고개.

일명 십이령재 또는 십이령티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봉화군 소천면까지 이어지는 열두 고개, 바릿재·평밭·새재·느삼밭재·너불한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고치비재·멧재·배나들재·노루재를 일컫는다. 1950년대 중반까지 울진의 흥부장과 울진장, 봉화의 내성장과 춘양장을 오가던 장사꾼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전한다.

'바지게꾼' 또는 '선질꾼'으로 불리던 이들은 울진에서 산 해산물을 지게에 지고 150여 리에 이르는 고갯길을 걸어 봉화에서 곡식·의류·잡화 등과 교환하였다. 6·25전쟁 이후 무장공비가 출몰하고 다른 교통로가 생기면서 발길이 끊어졌다고 한다. 고개 초입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0호 울진내성행상불망비()가 있으며, 새재 부근에 '조령성황사()'라는 편액이 달린 서낭당이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십이령 [十二嶺]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30939&cid=40942&categoryId=33301




십이령재 커뮤니티 바로 뒤에 삼당분교가 자리를 잡았어. 예전 같으면 여긴 첩첩산중 오지 중의 오지였겠지. 여선생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가더라고.




그 장면을 한참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자전거에 올랐어.



슬슬 진이 빠지기 시작했어. 조금 더 올라가서 쉬기로 마음먹었지.



포플러나무가 솟아오른 이런 장면을 보면 마음이 아려와.



잠시 쉬어가기로 했어. 이런 작은 집은 무엇일 것 같아?



울진 새재 성황사였던 거야. 아까 저 위에서 소개했던 십이령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돼.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미신일 수 있지만 옛 보부상들에겐 성황신을 섬기는게 삶의 일부분이었을 거야. 운동 시설을 겸한 마을 쉼터가 아주 깔끔했어.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우리 삶의 질이 정말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게 돼.




도로가에 만들어 놓은 버스 정류장에 가보았어.



울진군 버스 시간표가 붙어있더라고. 왜 내가 사는 곳 시골에는 이런 게 없지?



코스모스가 피어있었어. 나는 다시 달렸어.





길은 슬슬 오르막으로 변하고 있었어. 그러다가 멋진 시설을 만난 거야. 커다란 돌 비가 서있는 여긴 뭐지 싶었어.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