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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그 남자와 그 여자

그 남자와 그 여자 4

by 깜쌤 2018. 12. 1.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수필가 한분이 계십니다.

 

 

 

글을 얼마나 맛깔나게 잘 쓰시는지 읽을 때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언젠가 말을 섞어보니 고향도 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그 분이 쓰신 글 가운데 한편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전화를 드려 허락을 얻고 글의 전문을 실어봅니다.

 

 

 

그리 길지 않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산비둘기

                                                                                  

                                                                                                    안 병 태

 

 

내가 뭐 별말이야 했어? 시름시름 앓던 엄마가 곡기를 끊더니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등교하는 나를 불러 세우고는 뜬금없이, "내가 없더라도 동생들 잘 키워라. 예배당 빼먹지 말고 잘 다녀라. 동생들에게 우는 꼴 보이지 마라. 엄마 말 잊어먹지 마라."

숨을 헐떡이며 당부하시기에, "오늘은 지시사항이 평소와 사뭇 다르구나'하면서도 늘 하던 잔소리려니 생각하고 건성으로, "엄마 어디 가는데?" 한마디 던지고는 학교로 내뺀 죄밖에 없어.

 

 

 

그게 엄마와 이승에서 나는 마지막 대화야. 이튿날 새벽, 내가 잠든 사이 요단강을 건너가실 줄 누가 알았겠어? 머나먼 길에 배웅조차 못해드린 거지. 그때 엄마가 서른여덟 살이었고, 내가 열넷, 동생 셋 중 막내가 젖먹이였어. 나는 지금도 엄마가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지 몰라.

 

 

 

왜냐고? 가금 소다를 한 숟가락 씩 입에 털어 넣는 걸 보았을뿐, 가끔 약방에 달려가 활명수 한 병씩 사다 드린 것 뿐, 병원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병원 문턱만 넘어서면 죽고 싶어도 못 죽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려내고 말지만 그 시절엔 다 그렇게 죽었어.

 

   

 

엄마를 산에 묻고 학교엘 갔더니 첫 교시가 영어인데 숙제검사부터 하더군. 숙제 안 해왔다고 노처녀, 말괄량이, 주근깨, 히스테리 선생이 지시봉으로 내 머리통을 딱 딱 딱 때리는 거야. 숙제 안 해온 이유를 묻는데 대답이 나오지 않더라.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마냥 서 있으려니까, 감히 선생 물음에 대답을 않는다며 또 딱 딱 딱 때리더군.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굵은 물방울은 아파서 흘린 눈물이 아니야. 그냥 서럽더라.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때 먼산에서 뻐꾹 뻐꾹 뻐꾹새가 울더군. 엄마 가신 때가 5월, 한창 보릿고개라 엄마 무덤 아래 설익은 보리밭 머리에서 뻐꾹새는 울고, 교실 안에서는 노처녀 말괄량이 선생이 나를 부둥켜안고 히스테리로 울고 급우들도 덩달아 울었지. 5월이 계절의 여왕이라고? NO!  계절의 마녀야.

 

 

 

다음날부터 학교 가기가 싫어지더군. 책가방을 든 채 엄마 무덤을 찾아갔지. 어떻게 알아냈는지 말괄량이 선생이 그 무덤으로 날 찾아 왔더군. 그런 숨바꼭질이 두어 달 간이나 계속됐지. 붙잡아도 놓으면 산으로 달아난다고 산으로 달아나고 또 붙잡아다 놓으면 산으로 달아난다고 내 별명을 아예 "산비둘기"라고 지어주더군. 지금도 내 E-mail sanbidulgi1004@hanmail.net, 온라인의 각종 닉네임이 전부 "산비둘기'야. 지금도 선도산 기슭에 둥지를 틀고 산비둘기처럼 살고 있지. 

 

 

 

예배당 안 빼먹고 잘 다녔냐고? 주일마다 연보 바칠 돈 준비했다 한 푼씩 쥐여주던 엄마도 없고, 예배당에 안 가면 안 간다고 잔소리 할 엄마도 어디로 가고 없으니, 하루 빼먹고 또 하루 빼먹다 나중엔 청소년부 담당 집사님 보기가 면구스럽고, 위로와 타이름이 오히려 부담스러워 가기 싫어지더라. 

 

 

 

뿐이야? '주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한 가정을 이 지경으로 만드실까?'하는 따위의 원망과, 예배당에 가지 않는 자기변명 내지 구실을 찾게 되더군. 그런데 45년간이나 떠나있던 교회에 어떻게 다시 나가게 되었냐고? 그건 나도 몰라. 은퇴후 어느 주일, 나도 모르게 일찌감치 잠을 깨워 씻게 하더니, 옷을 갈아 입게 하더니, 먼지 앉은 성경책을 털어 가방에 집어넣게 하더니 내 발이 나를 이끌고 무작정 걸어가게 하는 거야.   

 

 

 

정처 없이 내 발 가는대로 따라가 멈춘 곳에서 문득 쳐다 보니 교회 종탑이 올려다 보이더군. 고향의 조그만 교회, 원두막 같은 그 종탑을 떠난 지 실로 45년만이지. 그게 전부야. 나머지 더 궁금한 사항이 있거든 그분께 여쭤봐. 저번에 나도 여쭤봤더니 그냥 빙그레 웃고만 계시더군.

 

 

 

동생들 잘 키웠냐고? 사내아이만 네 놈이 오글거리는데 잘 키워지겠어? 모조리 말라 죽지 않고 살아남은게 신기하지. 장마철에 보릿단 말리듯 파란만장했던 세월 끝에, '계모 시어머니'란 딱지 때문에 혼인 말이 오고갈 때마다 숱한 설움을 받아온 세월 끝에 드디어 막내가 장가들던 날, 엄마를 찾아가 목놓아 울었지. 

 

 

 

폐백마당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맏형을 찾아 그 언덕으로 올라온 동생들과 수십 년 서로 시치미떼고 숨어서 울었던, 서로 눈치 보며 들키지 않으려고 참고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터뜨려 합창으로 울었지. 다른 지시는 다 어겼어도 '동생들에게 우는 꼴 보이지 마라'고 한 지시 하나만은 잘 지켜 왔었는데.....

 

 

 

엄마들아! 어지간하거든 어린 자식 버려두고 가지 마라. 죄악 중 죄악이다. 아버지들아! 기둥뿌리를 뽑아 팔아서라도 애기엄마 못 가게 붙잡아라.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애기 엄마 가고 나면 그날부터 지옥이다.  

 

    

 

끝.

 

 

 

 

사건은 직접 겪으신 일 같습니다.

 

 

글 중간에 등장하는 선도산은 경주시가지 서쪽에 붙어있습니다.

 

 

 

그 분 고향이 아마 봉화 어디이지 싶습니다.

 

 

 

청소년기에 그분 마음밭이 이렇게 갈라져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젠 아름답게 편안하게 잘 사시면서 좋은 글 많이

발표해주시기를 빕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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