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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그 남자와 그 여자

그 남자와 그 여자 5

by 깜쌤 2018. 12. 18.

 

 

 

 

 

그 애

안 병 태(수필가)

 

사나이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이름 하나 새긴 여인은 복이 있나니 그는 이 세상에 왔다 가는 보람이 있다. 구름 세 뭉치만 모여도 눈이 내리는 곳, 한번 내린 눈은 이듬해 사월이나 돼야 녹는 곳, 소백산맥 겨울은 설국이다. 그 소백산맥 한 갈피에 자리 잡은 부석사, 그 아랫마을의 조그만 우체국에 통신사(通信士)로 첫 발령 받은 때가 열여덟 살이었다.

 

 

 

그해 초겨울 어느 퇴근길, 첫눈 치고는 눈이 제법 발목이 빠질 만큼 내렸다. 이런 눈을 두고 하숙집으로 바로 들어가면 그게 어디 총각인가. 눈사람을 만들까? 강아지처럼 설국을 뛰어다녀 볼까? 처마 밑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출입문이 빠끔 열리더니 전화교환견습생 미스 박이, ‘벌써 첫눈이네~ 퇴근길을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쏘옥 내민다

 

 

 

마침 잘 됐군. 같이 눈사람 만들까?”

눈길 걸어갈 일이 심란한데 눈사람 만들 여유가 어딨어?”

내가 있잖아. 집까지 업어다 줄께."

"누가 보면 어쩌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문을 밀고 나온다. 나는 몸통을 굴리고 그 애는 머리통을 굴려서 얹었다. 그리고 같이 눈길을 걸었다.

 

 

 

설국을 나란히 걸어가는 열여덟 동갑내기, 분위기는 의외로 둘을 벙어리로 만들고 만다. 묵묵히 눈길을 사박사박 걸어간다고 속마음까지 고요할까. 가슴은 콩닥콩닥, 입술은 간질간질, 하지만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오기만 기다릴 뿐, 설익은 두 숙맥이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다.

 

 

 

 

 

말없이 걷기가 멋쩍은지 그 애가 아까부터 눈을 한 움큼 거머쥐고 조물락거리고 있었다. 송편을 빚듯이. 저 손자국으로 빚은 송편을 평생 얻어먹을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함직도 하건만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었던가 보다

 

 

 

내 하숙집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숙집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이르자 그 애가 먼저 멈춰서며 불쑥 손을 내민다. 악수를 청할 리 만무하지만 얼떨결에 나도 마주 손을 내밀었다. 그 애가 내 손바닥에다 그 눈 송편을 살며시 내려놓더니 말끄러미 내 눈을 들여다보며,

따뜻하지요?”한다.

명색이 눈인데, 아무리 손에 쥐고 주물렀어도 눈인데 자기 체온으로 데웠으니 따뜻할 거란다.

앗 뜨거!”

호호

그 애네 과수원집은 무인지경을 아직 한참 더 가야 한단다. 내가 앞장서 걸어가며 그 애 보폭만큼 발자국 길을 만들어주었다.

 

 

 

조용히 내 발자국을 따라오던 그 애, 멀리 시골예배당 종탑의 십자가가 보이는 자기 동네 어귀에 이르자,

 

안 돌아가요?”

썰렁한 하숙집보단 눈길 걷는 맛이 더 좋은데?”

시골동네 금방 소문나. 그만 돌아가요.”

처녀 총각이 함께 걸어가면 당장 소문이 쫙 퍼져 혼인길이 막히던, 어처구니없던 시절이었다.

 

 

 

 

 

 

별 걱정 다 하는군. 집에서 쫓겨나면 내가 데려가지 뭐.”

싱겁기는, 누가 따라간데? 어린 총각이 못하는 말이 없어!”

같이 걷기 싫으면 돌아갈게.”

미안해요. 그 대신 다음 주 크리스마스엔 우리 예배당으로 초대할게.”

그 좋은 생각이군. 혼자 가자면 추울 텐데 자, 손난로! 아까보다 더 뜨거워졌지?”

아이 따뜻해!”

그 애랑 내 체온으로 데워진 눈 송편을 되돌려 주었다. 저만치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그 애를 향해 눈을 뭉쳐 던졌다. 그 애도 마주 던지는 시늉을 하더니 내게로 뛰어와,

하숙집까지 꼭 쥐고 가요.”

하며 눈 송편을 내 손에 다시 쥐어주었다.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그 애 발자국을 함박눈이 메우고 있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얻어먹고 벽에 기대 한숨 설핏 졸다 깬 것 같은데 그새 벌써 첫눈이 마흔여덟 번이나 내렸다. 둘이서 남긴 눈 위의 그 발자국은 속절없는 세월이 메워버리고……  어제가 까마득한 옛날 같을 때도 있지만, 아득한 옛날이 어제 같을 때도 있다.

 

 

 

 

첫 발령지 부석우체국의 여섯 달, 우리가 주고받은 것이라곤 눈송편에 묻어 오고간 서로의 체온, 그 애를 만나기 위해 주일 마다 그 동네 예배당에 찾아가 남몰래 주고받은 눈길이 전부였다. 영화 러브스토리비슷한 장면도 연출해보지 못한 채 그 애와의 설국 스토리는 중간에서 끝나버리고 말았다. 전근발령장이 내려온 것이다.

 

 

 

평소 우리 소꿉장난을 눈치 채고 있던 국장이 송별연에서 굳이 그 애에게 이별가를 부르도록 권하니 마지못해 목이 잠겨 불러주던 '섬마을 선생님'. 사아랑한 그 이이름은 총가악 선생니임 서우우울엘라앙 가지를 마아오……

 

 

 

 

소백산에서 남으로 사백 리, 눈이 귀한 경주에도 모처럼 눈발이 날린다. 차 지붕에 깔린 눈을 한 움큼 긁어모아 꼭 쥐어본다. 옛날의 그 체온이 남아있을 리 없건만,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손에 거머쥔 눈 송편이 따뜻한 것 같기도 하다.

 

 

 

 

불현듯 선도산 너머 잿빛 하늘에 설국의 예배당 종탑이 보이고 파노라마 몇 장면이 펼쳐진다. 어디에 살고 있나. 눈 송편을 주고받던 열여덟 살 그 애의 뽀얗던 손등에도 이제 퍼런 핏줄이 돋아났겠다. 장로님 외동딸이었던 그 애도 이제 은퇴권사님이 될 나이가 되었다. 늦게나마 내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도록 기도해 준 여러 사람 중엔 그 애도 섞여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세월이 흘러 하얗게 바랜 이름, 첫눈 내리는 순간이면 복수초처럼 노랗게 얼굴 내미는 이름, 이만큼 멀리 와 이젠 소문날 걱정도 없을 이름…….

貞心~~! 

 

끝.

 

 

 

윤병태님의 수필 <그 애>를 소개해봅니다. 문단은 제가 임의로 나누었고 사진은 찍어둔 것 가운데에서 골라 넣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어떤 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만 강아지 사진을 넣은 것은 그 분의 이미지를 제가 상상할 수 없는데다가 특정 인물의 사진을 쓰기가 곤란해서 대신 넣은 것이니 절대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첫문장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윤병태님의 또 다른 수필을 보기 원하신다면 아래 글 주소를 눌러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yessir/15869176

 

'사나이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이름 하나 새긴 여인은 복이 있나니 그는 이 세상에 왔다 가는 보람이 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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