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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 시내 누비기 2

by 깜쌤 2018. 9. 22.


유달산의 이모저모를 살펴가며 천천히 달렸다.



어제 오후에 보았던 목포대교가 나타났다.



그제서야 목포항구의 전체적인 생김새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목포해양대학교가 바로 옆이었다. 위치 하나는 절묘하다. 돌아가신 자형이 외항선의 일등항해사로 일했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나는 유달산을 한바퀴 돌았다. 신안군청이 있는 압해도로 이어지는 다리를 보았으면서도 촬영해두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다.  



결국은 아침에 방문했던 장소 부근까지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목포북교초등학교 정문까지 왔다.



이 학교 졸업생중에 대통령이 한분 나오셨단다. 바로 후광 김대중 대통령이시다.



아마 30회 졸업생이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학교가 한층 더 기품있어보였다.



시내로 돌아나가다가 불종대를 만났다.



불종대의 유래는 사진속의 내용을 훑어보는게 빠를 것이다.



이름이 재미있다. 불종대!  순수하면서도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달산 언저리를 맴돌다가 저지대 바닥으로 내려왔다.



여기가 구시가지 중심가인가보다.



도시가 제법 짜임새있었다. 어찌보면 내가 사는 경주보다 훨씬 나은듯 하다.



소규모 공원 한구석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목포진으로 올라가기 위해 비탈길을 걸었다. 


 

중앙성결교회 옆을 걸어올라갔다.



작은 봉우리위에 목포진 유적이 남아있었다.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주둔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객사를 복원해서 남겨두었다. 목포지관이라는 글씨가 현판에 또렷하게 박혀있었다.



객사가 위치하고 있는 봉우리 정상부근을 잘 정비해두었다.



객사를 나온 나는 성곽처럼 둘러놓은 곳으로 천천히 걸었다. 


 

지도를 가지고 확인해보니 목포진 역사공원으로 나타났다.



언덕에 올라보니 항구가 바로 발 아래다. 목포진역사공원이라는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목포항은 위치도 절묘하거니와 꽤나 아름답다.  



조선시대에는 남도 해군을 총괄하는 좌수영건물이 여기에 존재했었던가보다.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남겨진 장소인가 싶어서 나에게는 더 깊은 의미를 가진 유적지로 다가왔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한가지이건만 모든 일에 지역감정을 가지고 옹졸하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정말 싫다. 내 부근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이들과는 가능한 한 말을 섞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그런게 너무 싫었다.



나는 안동사람이지만 누님 한분은 전주로 시집을 갔고 사돈 한분은 광주 바로옆 화순이 고향이다. 그런 분들과 좋은 인연을 맺은게 너무 행복하고 좋다. 이 좁은 나라에서 특정지역을 들먹이는 것은 범죄라는 생각이 든다.



동네 할머니들이 정자에 모여앉아 자장면을 주문하고 계셨다. 나도 불현듯 점심생각이 났다. 정자 맞은편에 보이는 섬들이 삼학도인가보다. 목포까지 왔으니 반드시 삼학도를 보고가야한다.



나는 비탈길을 내려왔다. 교회 옆 건물에서 불경소리가 났다. 재미있는 곳이다.



점심특선으로 곰탕을 할인판매하는 가게에 들어가서 남도음식을 먹었다.



남도답게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다. 나 혼자서 즐기는 여행이니 홍어같은 특산물을 먹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온김에 먹고가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절약정신이 몸에 스며들대로 스며든 내가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인공폭포에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원스럽다.



목포 구시가지는 정겨움이 넘쳐흐르는듯 하다. 한번 더 가야겠다는느낌이 간절하다.



목포역앞을 지나서는 호남선을 가로지르는 육교위로 올라갔다.



철길을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내려갔다.



곧바로 목포항구가 나타났다. 왜정시대때 수많은 자원을 강탈당해 일본으로 반출된 곳이리라. 애환과 아픔과 슬픔이 가슴속으로 마구 밀려들어왔다.



이 정도 닻을 사용한 배라면 제법 컸을 것이다. 어구들이 부두에 뒹굴고 있었다.  



작은 운하를 지났다. 건너편 섬이 삼학도일 것이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라면 '목포의 눈물' 정도는 부를 줄 알다.  



나도 젊었던 날에 참 많이 불렀다. 즐겨부르던 애창곡가운데 하나였으니 대중가요와는 발걸음이 많이 멀어진 오늘날에도 자신있게 외워서 부를 수 있는 곡이 바로 그 곡 '목포의 눈물'이다. 



나는 삼학도 표지석앞에 잠시 멈추어서서 사방을 살폈다. 그리고 나즈막하게 한곡 뽑았다. "사아고오옹의 배애앳노오래애애~~"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 이난영(李蘭影) 노래의 대중가요.

                                      

1935년 초 『조선일보』에서 향토 노래 현상 모집을 실시했고, 거기서 당선된 가사에 곡을 붙여 9월 신보로 발매되었다. 1936년에 일본에서도 음반이 발매되었고, 애상적인 멜로디는 일본인에게도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한다. 모두 3절로 된 노랫말의 1절은 다음과 같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시 아롱져진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4분의 2박자, 라단조, 약간 빠른 빠르기의 자유로운 형식의 곡이다.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로 시작되는 2절의 가사가 문제되어 가사지를 인쇄할 때에는 고친 가사를 표기하기도 했다.


작사자와 가창자가 모두 목포 출신인 이 곡은 일본식의 곡풍을 지녔으나 지금도 끊임없이 불리고 있는 곡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곡을 기념하기 위한 한국 최초의 대중 가요 노래비가 목포의 유달산 중턱에 세워져 있다.


출처 : DAUM 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8739



 

삼학도를 자전거로 한바퀴 돌아서 다시 원래 자리로 왔다. 난영공원에서는 잠시 쉬다가왔다.



삼학도를 보았으니 이제 다음 목표는 갓바위다.



빠져나간 뻘위에 구조물 하나가 덜렁 걸려남았다.



작은 어선 한척도 남았다. 이제 물이 다시 들어오면 뜨게되리라.



바닷가로 시원스럽게 이어진 도로를 달렸다. 자전거도로 위로 몰려오는 바닷바람이 한없이 시원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