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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 삼성혈에서 항구를 향하여

by 깜쌤 2018. 9. 8.


나는 97번 도로를 따라 꾸준히 달려나갔다. 97번 도로는 기본이 왕복 4차선이었다. 도로가로는 자전거길이 만들어져 있어서 크게 위험할 것은 없었다. 


 

송당승마장을 한참 앞두고 갑자기 자전거 속력이 늦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뒤에서 당기는듯 했다.



그게 타이어 펑크의 전조임을 알아차려야했지만 그걸 깨닫지 못했다.



학생들이 단체로 승마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이나 청년기에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대천교차로에서 펑크가 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뒷바퀴가 완전히 납작해져 있었다. 대천교차로였기에 인근에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자전거를 끌고 한참을 가야할뻔했다. 제주항까지는 아직도 22킬로미터나 남았는데 난감했다.



자전거를 접어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십오분 정도를 기다려서 시내버스를 탈 수 있었다. 기사는 원칙적으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태워주었다. 내 입장에서는 고맙기만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더니 제주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 있는 종합경기장에 수리센터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는 중간에라도 자전거방이 있으면 내리려고 마음먹고 바깥을 살폈다. 버스는 시내로 들어섰고 경기장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길가에서 마침내 자전거 가게를 발견하고 하차했다. 주인은 내 자전거를 보더니 펑크 때우기가 곤란하다면서 튜브를 교체해야한다고 했다.


튜브 교체비용으로 2만5천원을 불렀다. 그 정도면 평소가격의 두배가량이다. 소형 튜브여서 구하기가 어렵다는 식으로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제주도를 찾아온 나그네에게 그런 식으로 덤터기를 씌우는 것은 온당치 못한 행위다. 한번 보고 말것이라는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정보가 빠르게 흘러다니는 인터넷 시대라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하다.  



자전거를 수리했으니 그때부터 다시 행동의 자유를 얻었다. 부근 어디에선가 점심을 먹고 제주항구로 가야만 했다.



네이버 지도를 보고 위치확인을 한 뒤 삼성혈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삼성혈을 찾기란 너무 쉬웠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 그땐 국민학교라고 했다 - 교과서에서 삼성혈에 관한 내용을 본 기억이 난다. 삼신인(三神人)이 나온 성혈(聖穴)이 보존되어 있다는데 거기에서 나온 분들이 양을나, 부을나, 고을나라고 했던가?  



자전거를 세워두고 표를 사서 들어갔다.



감히 단언하건대 인간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나는 당시 사용했던 교과서 내용도, 삽화도 기억하는 내용이 제법 많다.



나는 쉼터에 앉아서 찬찬히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 같은 이름들과 삼성혈에 얽힌 전설들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다시 정신을 차린 나는 삼성혈을 보기전에 구내에 배치되어 있는 건물들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서원구조와 비슷한 것으로보아 묘사(廟祠)관련 건물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사방에는 적막감이 가득했다.



건물 구조가 서원과 많이 닮았다.



아무렴 어떠랴?



관리사실 맞은편에 삼성문이 존재한다.



삼성혈의 전설을 내가 소개하는 것보다 삼성혈 홈페이지에 올라와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드리는게 예의에 맞지 싶다.




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主山(주산)인 한라산이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이라는 곳에 三神人(삼신인)을 同時(동시)에 탄강 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년 전의 일이다.

三神人이 태어난 곳을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는데 三神人이 湧出(용출)하였다 하여 三姓穴(삼성혈)이라 하며 3개의 地穴(지혈)이 있다. 이 神人들을 이름하여 乙那(을나)라 하며 세성씨의 시조이시며 탐라국을 개국하시었다. 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① 용출 : (샘물이 솟아나는) 솟아나옴


출처 : http://www.samsunghyeol.or.kr/sub/?p=1_myth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木函(목함)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둥근 玉函(옥함)이 있었으며 자주빛 옷에 관대를 한 使者(사자)가 있었는데 그 사자가 玉函을 연즉 靑衣(청의)를 입고 姿色(자색)이 출중하고 稟質(품질)이 端雅(단아)한 공주 세사람이 좌석을 整齊(정제)하여 같이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 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듯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하여 기뻐했다.


使者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碧浪國(벽랑국)의 사자 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紫宵閣(자소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주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三神人이 강임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음으로 이에 臣(신)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伉儷(항려)의 예식을 갖추어 큰 國業(국업)을 성취 하시옵소서”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는 동쪽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三神人은 祭物(제물)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公主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됐다 하겠다.


②  청의 : 푸른옷

③  자색 : 예쁜여자의 얼굴, 자세와 안색

④  품질 : 품성

⑤  정제 : 정돈하여 가지런함.

⑥  벽랑국 : 동해 전설(이상ㆍ상상)의 나라

⑦  자소각 : 하늘에 있는 궁궐의 누각

⑧  항려: 짝. 남편과 아내, 배필

⑨  국업 : 나라를 일으킴


출처 : http://www.samsunghyeol.or.kr/sub/?p=1_myth




그래서 자주빛 함이 올라온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延婚浦(연혼포)라 하며 지금도 삼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해안가에 남아 있다. 또한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을 婚姻池(혼인지)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神房窟(신방굴)이라 하며 그 안에는 각기 3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

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로 정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 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이룩했다.

그 활 쏘은 지역을 射矢長兀岳(사시장올악)이라 하며 활이 명중한 돌을 한데 모아 보존하니 제주시 화북경의 三射石(삼사석)이라 하는데 조선조 영조 11년(서기1735) 김정목사가 삼신인의 활 솜씨를 경탄하여 기념코자 『三射石』이란 비를 세우고 비면에 시를 지어 추모하니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그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탐라국 왕손들이 신라에 입조하여 작호를 받았으며 신라,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유구왕국과도 독립국가로서 교류하고 소규모나마 물물을 교환하는 해상교역 활동도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후 수천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 하다가 고려시대에 합병됐다.


⑩ 혼인지 : 혼인한 연못

⑪ 신방굴 : 신인이 방으로 사용했던 굴


출처 : http://www.samsunghyeol.or.kr/sub/?p=1_myth



유구왕국은 오늘날의 오키나와 섬에 존재하던 나라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삼성혈은 탐라국의 시조이신 삼신인 즉, 三乙那(삼을나)왕께서 湧出(용출)하여 제주를 개황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현존 유적이다. 또한 이 신비한 성혈에는 눈이 많이 오거나 빗물이 수없이 내려도 쌓이거나 고이지 않으며 면면이 이어온 수백년된 고목들도 모두 다 혈을 향하여 고개를 숙여 경배하듯 가지들을 팔벌려 감싸 안고 있다.

삼성혈에 처음 설단하여 치제한 때에는 서기 1526년(중종21) 이수동목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조정을 대표하여 제주목사가 홍문과 표단을 설치하여 봉향하였으며 특히 유교국시의 조선조에 와서는 조정의 각별한 배려와 역대 목사들의 존숭치적으로 더욱 신성시하였다. 1785년에는 정조대왕이 “三姓祠”(삼성사)라는 편액을 친히 하사하시어서 王(왕)에 대한 예우로써 國祭(국제)로 봉향하도록 하교하였다.


⑫ 국제 : 나라에서 주관하는 제사


출처 : http://www.samsunghyeol.or.kr/sub/?p=1_myth




제향은 매년 4월 10일에 춘기대제를 10월 10일에는 추기대제를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봉향하고 12월 10일에는 건시대제라하여 혈단에서 드리고 있는데 모든 제관들은 왕에 대한 예우로써 금관제복을 착용하여 3일전에 입재하여 목욕재계하고 제향에 임한다. 그리고 이 건시대제는 조선시대에는 국제로 모시다가 현재는 제주도민제로 봉행하고 있으며 초헌관은 제주도지사, 아헌관. 종헌관은 덕망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중에서 추천된 인사가 맡고 있다.

인류 역사의 변천과 국가 형성 과정을 보면 통치 지역이나 권력을 중심으로 한 투쟁의 연속인 것이 상례처럼 보이지만 三神人이 세공주를 맞이하여 아무런 다툼이 없이 배필을 정한 것이나 생활의 터전을 활을 쏘아 정한 것이나 분할지역을 정한 후에는 지역을 확대하기 위한 영토전쟁이 없었던 것은 오늘날 제주인의 평화 존중의 정신이며 수눌음과 조냥정신 및 자립과 화합정신의 기틀이요, 이러한 정신이 바탕이 되어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부를 창조하였고 외세의 침략에 굴하지 아니한 강인한 개척의 정신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⑬ 수눌음 : 힘드는 일을 이웃간에 서로 거들어 가며 함. 품앗이 

 ⑭ 조냥 : 물건을 아껴서 낭비하지 않음. 절약


출처 : http://www.samsunghyeol.or.kr/sub/?p=1_myth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글 내용이 어려워서 한자를 모르는 젊은 세대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낱말뜻은, 출처를 기록해두었으니 거기가서 살펴보면 설명이 존재할 것이다. 내가 글은 이렇게 써두었지만 누가 출처까지 찾아가서 굳이 확인하랴싶다.  



나는 해안쪽을 향해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갔다.



현대식으로 변해버린 도로 옆에 옛날집이 남아있기도 했다.



도로가에 새로 지어진 건물들은 점점 세련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제주성터인 모양이다.



성벽부근에는 토끼풀이 자라고 있었다.



제주 향로당(香老堂)이 나타나고 곧 이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나는 동문시장 안으로 들어가서 골목에다가 자전거를 세웠다.



젊은이들이 바글거리는 곳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다.


 

쫄면 한그릇이 6천원이었다. 먹을만했다. 아침에 먹은 비빔밥은 7천원이었는데.... 



점심을 먹었으니 이젠 제주항으로 이동해야한다. 시장에서 오메기떡을 사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지난 8월에 당한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때 어떤 분이 제주갔던 기념이라고 하면서 오메기떡을 가지고 오셔서 그로부터 한달 뒤에 기어이 맛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물길을 따라 달렸다. 제주항으로 가는 것이다.



물길 정비가 잘되어있었다.



제주연안여객터미널 건물이 등장했다.


 

나처럼 자전거를 가지고 배를 타는 분들이 제법 보인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매를 해두었었다. 3만 8백원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티켓을 받았다. 배를 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어야한다.


 

일반 승객들은 개찰을 받고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준비했다.



하지만 자전거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은 셔틀버스 뒤를 따라가게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가 먼저 출발하고 나는 버스 뒤를 따라 달렸다.



오후 1시 40분발 산타루치노호다.



뒤로 들어가서 입출구 부근 벽쪽으로 자전거를 세워두면 된다. 그런 뒤 곧바로 위로 올라가면 되지만 나는 다시 돌아나왔다.



트랩을 따라 올라가보고 싶었다. 부두를 걸어 파란색 트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하는 손님은 드물었다.



배에 올랐다. 제주 항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 배를 탔으니 이제 출발만하면 목포를 향해 가게 될 것이다.


 

산타루치노호는 페리보트다 차를 가지고 타는 운전기사들이 묵는 방들이 모여있는 구역을 지나 일반승객들이 들어가는 방을 찾아갔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