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그를 바오다이 황제라고 부른다.
그는 베트남 완씨 왕조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1926년 1월 8일에 즉위한뒤 연호를 바오다이라고 했다. 한자로는 보대(保大)라고 하지만 베트남식 발음으로 바오다이가 되는 것이다.
바오다이는 우리가 잘 아는 일본의 명치(明治 메이지), 대정(大正 다이쇼오), 소화(昭和 쇼와)같은 그런 연호 이름과 같은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에 일왕 히로히토가 항복선언을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정식으로 종언을 고했다. 히로히토가 쓴 연호가 소화(昭和 쇼와)다.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므로 연호라는 것을 쓰지 않고 만국 공용의 서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가 서기 2018년이지 않은가?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것은 즉각적으로 베트남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 제2차 대전 초기에 독일이 프랑스에 침입하여 필리프 페탱이라는 인물을 앞세워 빨리 남쪽 비시에 허수아비 정권을 세우고 프랑스를 조종했듯이 일본은 1945년에 베트남에 침입하여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바오다이를 수반으로 하는 허수아비 정권을 유지시켜 주었다.
그는 1926년에 즉위했을 때에 이미 실권이라고는 거의 없는 프랑스의 허수아비였고, 나중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한답시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것도 이름뿐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일본의 허수아비 노릇까지 하기도 했으니 어찌보면 불쌍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방탕하게 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치적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부의다.
그도 바오다이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부의는 마지막에 정원사로 살다가 죽었다.
노후까지 편안하려면 절대 권력자들은 피도 눈물도 없어야한다는게 철칙일지도 모른다. .
벽에 걸린 공예품 지도를 보았더니 푸꾸옥 섬까지 베트남 영토로 표현되어 있었다.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한자로는 호지명, 일명 호 아저씨)에 의해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출범했다. 그 와중에 정치적으로 이리저리 이용당하던 그는 한때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있던 홍콩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게 1946년의 일이었다.
1946년에는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발발했다.
이리저리 방을 옮겨다니며 1층 구경을 하던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반도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제국주의의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가 베트남을 거점으로 하여 다시 세력회복을 꾀하려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도 그런 움직임을 보였다.
1949년,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베트남에 귀국한 그는 남쪽에 기반을 둔 베트남 공화국의 수반(정식 이름으로는 주석)이 된다.
그런 와중에 프랑스 세력은 베트남 북부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하여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1954년의 제네바 협정에 의해 베트남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바오다이는 잠시동안이나마 남쪽 정부의 책임자로 인정받았지만 민심이반으로 인해 얼마후 그런 자리에서조차 물러나게 되었다.
1955년의 국민투표에서 베트남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되었고 응오 딘 지엠(예전 한때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그를 고 딘 디엠이라고 불렀다)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됨으로써 바오다이는 완전히 축출되고 만다.
응오딘지엠은 한자로 오연염(Ngô Ðình Diệm
나이든 세대에게는 어쩌면 귀에 익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황제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고문으로, 다시 베트남공화국의 주석으로 변신했던 그는 끝내 주석자리에서도 쫓겨나서 다시 망명의 길을 걸어야했다.
그가 망명한 곳은 프랑스 빠리였다.
남방황후라고 불렸던 완유씨가 그의 정식부인이었다.
이 여성의 초상화가 그녀인지 그것까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황제였으니 후궁도 있었다.
영비 호씨와 황소란, 배몽접 같은 여성이다.
완복보륭(Nguyễn Phúc Bảo Long 阮福保隆)이라는 이름을 가진 황태자도 있었다.
물론 다른 아들도 있었다.
모두 5남 6녀를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오다이는 프랑스에서 죽었다.
1997년, 83세의 나이로 프랑스 육군병원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후손들은 어찌 되었을까?
역사의 뒷부분까지 알면 씁쓸해진다.
그가 달랏에 만든 여름 별장의 제일 마지막 공간은 의류와 기념품을 파는 가게로 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나는 정원구경에 나섰다.
누가 탔던 차였을까?
모든 것은 세월의 흐름속에 묻혀버렸다.
나는 뒷마당으로 가보았다.
뒷마당 정원 소나무가지 사이로 서민들 삶의 공간이 초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정원도 그리 반듯하게 손질되어 있지는 않은듯하다.
나는 자수품을 만드는 가게에 들러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하나 정도는 구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제는 새로운 것을 수집하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을 처분해야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오다이 별장 바깥 공간으로 나갔다.
그 다음 행선지는 크레이지 하우스다.
지도에서 크레이지 하우스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걸어가기로 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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