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돌아서기가 너무 아쉬워서 제비들에게라도 작별인사를 하고 나가기로 했다.
누가 아무 생각없이 현관문을 닫아버리면 어쩌나싶었다.
그런 일은 없어야할텐데.....
제비 부부들은 집이 다 만들어지면 알을 낳을 것이다.
녀석들은 활기차게 날개짓을 하며 밖으로 날아갔다.
나는 다시 운동장으로 걸어나갔다.
이젠 여기를 벗어나야한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소사(그때는 청부라고 불렀다)로 근무하셨던 박누구누구씨가 생각났다. 1960년대, 1970년대의 국립대학교 사범대학은 내노라하는 수재들이 몰려드는 인재들의 산실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그분의 아들이 나중에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것으로 전해들었다.
그분은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청부로 들어오셨다고 했다. 워낙 능력이 뛰어나셨던 분이라 나중에 교육청으로 불려가서 보직을 변경해서 근무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그 집 딸아이를 가르쳤었다.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두뇌가 아주 총명했다.
낙오 이동우선생의 공적비가 교정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처음 발령받아갔을때 그 어른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역사에 아주 밝으셨던 선비셨다. 처음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을 때 두뇌가 아주 총명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맞은편에는 교적비가 남아있었다.
1997년에 폐교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내가 떠난 뒤 7년쯤 뒤에 폐교되었다는 말이 된다. 마음이 아렸다.
유계리 마을에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내가 이 학교에 근무할때 정말 철없는 짓을 많이 했다.
분재만들기에 눈이 어두워져 나무들을 제법 많이 죽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나의 어리석음때문이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낯이 뜨겁기만 하다.
저 멀리 보이는 산에 당시에는 분재용 나무들이 제법 많았다.
산에서 분재용 나무를 캐는 행위를 산채라고 하는데 그건 범죄행위가 된다.
왜 그리 어리석고 철이 없었던지.......
마을 한가운데로 지나는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었다.
나는 수요일 저녁에 한번씩 출석해보았던 교회에 가보았다.
옛교회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교회마당을 나왔다.
예배당 맞은편 숲은 운동시설을 갖춘 쉼터가 되어있었다.
냇가에 버들이 많아서 마을 이름이 유계리라고 하였다고 했다.
숲속 쉼터가 아담하다.
나무들 사이로 새로 지은 교회가 보인다.
여기에 근무했던 것이 30년도 전의 일이니 참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왕 마을에 들어왔으니 안으로 더 올라가보기로 했다.
여기가 누구의 집이었더라?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봉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이 부근 어디에 살았던것 같은데......
그 아이들이 모두 이젠 사십대 중반이 되었을거다.
모두들 어디에 사는지 모르겠다.
저수지 둑이 앞을 가로막았다.
저수지 안에도 마을이 있었는데.....
그분들은 모두 실향민이 되었으리라. 나는 자전거에 올라 청하로 달려내려가보았다.
그런 뒤에는 방향을 틀어 왔던 길을 되짚어서 돌아가야지하고 마음먹었다.
청하까지 온 김에 마을구경만 잠시 해보기로 했다. 학교경리를 맡고 있던 나는 직원들의 봉급을 수령하기 위해 한달에 한번씩은 청하에 꼭 들러야만 했다. 농협에서 엄청난 돈을 찾아서는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고 학교로 내달렸었다.
니는 청하중학교와 기청산 식물원쪽으로 가보았다.
그런 뒤에는 신광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마구 달려서 경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불쌍한 아이로 표현했던 남누구누구의 아버지가 일하시던 명안리 옹기공장앞을 지난다.
아직도 옹기를 구워내고 있는 것일까?
모든게 덧없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마음이 허전해서 그런지 먹먹해진 가슴을 안은채 나는 안강을 향해 그냥 마구 달려나갔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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