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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내가 만났던 하나님 Confess (간증)

(간증) 기적 4

by 깜쌤 2017. 12. 4.

 

한달동안의 병가 휴가가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발급받은 나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학교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원인은 의학적으로 알게 되었지만 이것으로 인해 평생 고생을 해야하고 말을 아주 적게 해야하며 언젠가는 암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선생님의 소견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1987년 11월 2일 월요일, 나는 학교에 병가원을 제출했습니다. 병가원을 제출하면 단번에 처리해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학교당국에서는 지금의 학교 형편상 조금만 더 근무를 하고 나서 쉬면 어떻겠는가 하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장 자리도 비어있는데다가 교사 한사람이 빠져나가면 규정상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지금까지 힘들게 고생한 것은 알지만 당분간만 힘들더라도 한 열흘 정도는 더 근무를 해주고 쉬었으면 좋겠다길래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 한주일전인 10월 25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교사가 순번을 짜서 돌아가면서 숙직근무를 해야만 했습니다. 공휴일이나 일요일에도 역시 순번대로 학교에 출근해서 당직 근무(그런 근무를 일직근무라고도 불렀습니다)를 해야했기에 당직에 걸리는 날은 집에도 다녀가지 못하고 토요일 오후에 근무지에 남아있어야만 했습니다. 학교 숙직실 맞은 편 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나는 10월 24일 토요일에도 집에 다니러 가지 못하고 학교에 남아있어야만 했고 25일 일요일은 아침부터 꼬박 교무실에서 일을 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9월, 10월 두 달동안 밤에 캄캄한 운동장에 나가서는 학교 담장 밖 개울 건너 산밑에 자리잡은 교회 불빛을 자주 살폈습니다. 수요일 밤에 켜지는 예배당의 불빛이 바깥으로 번져나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저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한번씩은 그런 생각이 강렬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지 싶습니다.

 

나는 빛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환하고 밝은 빛을 갈망했습니다. 어둠고 음습한 그런 칙칙한 세계가 아닌, 밝고 환하며 행복 가득한 세계를 찾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어렸던 날, 나에게는 친척이 거의 없었습니다. 삼촌이 안계셨으니 사촌이 있을리 없었고 고모와 이모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고종사촌도 이종사촌도 없었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본 적이 없었고 할아버지도 뵌적이 없습니다. 유일한 기억은 외삼촌 한분과 친할머니 한분만 뵌 기억이 나는데 그 할머니도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명절때만 되면 유달리 쓸쓸했습니다. 올 이도 없고 갈 이도 없는데다가 올데 갈데가 없으니 설날이나 추석같은 명절에는 외로움만 가득했습니다. 형제들만 들어앉아 명절을 보내야했는데 그나마 일가붙이가 많은 친구 집에서 지내는 제사가 다 끝나는 오후 늦게서야  이웃집으로 놀러 갈 수 있었으니 외로움이 유달리 많았던게 사실입니다. 

 

 

 

결정적으로 외로움을 더 타게 된 이유가운데 하나는 중학교 1학년 시절 이후부터 살았던 곳에서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니 아는 친구가 있을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던 그해 겨울방학에 기차로 두시간 정도 걸리는 먼 곳으로 이사를 가야했으니 새로운 곳에 친구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내가 살던 동네도 작은 마을이었던지라 또래라고는 여자 아이 하나와 남자 셋이 전부였습니다. 나는 항상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새로 살게된 시골 마을에 부모님들이 모두 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 집에 자주 놀러갔습니다. 중학교 때 어느 겨울, 한없이 심심했던 나는 친구집에 갔는데 그날이 마침 성탄절 저녁이었던지라  희미한 호롱불빛이 살짝 새어나오는 창호지 바른 문짝 안에서 들려오던 친구네 가족의 찬송가 부르던 소리를 잊지 못합니다. 

 

나는 그런 따사로운 빛이 그리웠습니다.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따뜻한 빛이 너무 그리웠던 것입니다. 바닷가 학교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를 지켜야하는 밤이 많았는데 밤에 운동장에 나갈 때마다 교회 창문과 출입문에서 스며나오는 빛이 그해 가을에는 그렇게 포근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 내 마음이 시골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의 마음에 전해졌던 것이었을까요? 그 교회에서 시무하시는 젊은 전도사님이 일요일 오후에, 교무실에서 일직 근무를 하는 나를 만나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셨습니다. 나이는 저와 비슷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야무지면서도 약간은 땅딸막하게 생긴 분이셨는데 결혼을 했다고 했습니다. 자기 소개를 하면서 학교밖 작은 교회를 지키는 이 아무아무개 전도사라고 신분을 밝혔습니다.

 

어떤 연고로 어떻게 해서 나를 알게되어 찾아오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그분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슬며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도 그때쯤은 신약성경을 완전히 다 읽었으므로 하나님이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라는 것 정도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기에 이야기하시는 내용들이 머리속에 제법 쉽게 들어아 박혔습니다. 

 

첫만남은 약 한시간 정도의 만남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도사님은 교무실을 나가시면서 전화번호를 남겨주셨습니다. 우상 숭배가 극심한 바닷가 마을의 작은 시골교회였던지라 신도수가 적었기에 교회 형편상 목사님을 모시지 못하고 전도사를 모시고 있었던가 봅니다. 4년제 신학교나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 자격을 딴 뒤에 일정한 기간동안 근무를 해서 목사고시를 칠 자격을 얻고, 그후 시험을 쳐서 통과해야만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때는 신학교가 어떤 곳인지 뭘 공부하고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는 까맣게 모르고 살았습니다. 

 

 

한달간 쉬었다가 수술을 하기위해 병가원을 학교에 제출한 날이 1987년 11월 2일 월요일이었다고 위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전도사님이 살고 있다는 사택(=전도사관)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시간이 난다고 하면서 한번 찾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주일 전에 교무실을 방문했으니 답례차 방문하기로 마음먹고 전화를 드렸던 것인데 쉽게 시간을 내주시기에 학교앞 구멍가게에 가서 귤과 과자를 사들고 방문을 갔습니다. 

 

방안에는 그 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시는 동네 어른 한분도 함께 계셨습니다. 장로님이 마침 제가 가르치는 학생의 아버지여서 한자리에 쉽게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전도사님 부인(흔히들 사모님이라고 부르더군요)은 상당한 미인이셨습니다. 8시 경에 방문해서 9시 반경에 나왔는데 제법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으니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에 들어갔습니다.

 

숙직실 앞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는 왠지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일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날보다 좀더 마음이 홀가분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과 죄의식이 가득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다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정말 기도 하나는 많이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시간만 생기면 회개하고 신약성경을 보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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