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 처음 넣은 것이 2006년의 일이었다.
필름값에 대한 부담을 덜은 터라 일년에 한번씩은 유년시절의 추억이 엉긴 장소를 찾아가서 기록을 겸해 사진을 찍어두었다.
2010년 경이었던가? 송리원에 댐을 건설한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원래 말이 돌기 시작하던 송리원에 댐이 건설되었더라면 이쪽은 수몰을 면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물길이 영어의 S자 모양으로 휘돌아나가는 이 부근을 보며 허리가 잘록한 부분을 끊어서 물길을 직선화시킨 뒤 남은 곳을 농토로 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누가 지어낸 말인지는 몰라도 사실 그런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그런 소문이 돌았기에 어렸던 내가 그와같은 상상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랬던 것이 결국은 세월이 엄청 흐른 뒤에 댐건설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댐은 용혈리에 건설되었는데 완공되면 댐 호수가 용모습이 될 것이라고 했다.
물이 어느 정도 찰 경우 하늘에서 보면 용의 네다리까지 보인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처음에 행정구역 이름을 지을때 그런 사실을 미리 알고 용혈이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던 모양이다.
믿을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말았으니, 글쎄다......
2014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철길도 제거하고 마을도 하나둘씩 들어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영주에서 안동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직선화할 때 진작 눈치를 챘어야 하는 것인데 대응이 너무 늦었다.
환경운동 전문가들이 천성산 도롱뇽 사건으로 유명한 어떤 여자 스님이 주도했던 고속철도 터널 반대 운동보다 만약 내성천 댐건설 사업 반대운동에 먼저 눈을 돌렸더라면 환경운동전문가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천성산 도룡뇽 사건으로 유명해진 지율스님은 내성천 댐 건설사업 반대운동에도 뛰어들었지만 그땐 이미 추진 동력을 상당히 잠식당한 뒤였다.
다 지나간 일이니 사실 이제와서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다.
중앙선 철길이 놓여있던 자리인데 2014년 가을엔 이미 다 걷어냈었다.
모든 것이 다 물밑에 가라앉았다.
기어오르기조차 힘들었던 산 중턱에는 도로가 감돌아가고 있다.
이제 그 도로 밑은 거대한 호수로 변했다.
만수가 되면 이발사가 면도로 밀어낸듯한 산 중턱까지 물이 차오를 것이리라.
댐너머로 멀리 보이는 산이 학가산이다.
어렸던 날, 학가산 정상 라디오 중계탑에서 깜빡이던 불빛을 본 기억이 선명하기만 한데.....
그땐 그게 중계탑 불빛이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았다.
내가 처음으로 라디오 소리를 들었던 것이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1962년의 일이었으니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내가 간직했던 모든 추억은 물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내가 죽으면 그런 기억조차 그냥 사라지리라.
물에 잠기기 전 경치가 이랬었노라고 증언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쯤 될까?
유투브같은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보면 물속에 잠겨버린 내성천 주변의 마을과 내성천의 실제 모습에 관한 동영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이런 글을 굳이 쓰는 것은 기록을 남겨둔다는 의미가 더 많다. 철거되기 직전의 기차역 모습이다. 철로를 놓았던 노반을 거의 다 들어냈다.
평은 역 뒤에 흉하게 파먹혀진 이 곳은 원래부터 자갈이 많은 곳이었다. 1965년경부터 철도용 골재채취를 위해 작업에 들어가서 수십년동안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소음이 발생하고 분진이 날리자 결국 역마을은 사라지고 말았다.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를 자랑하던 곳에서는 GMC트럭들이 들나들며 한없이 모래를 퍼내갔다.
강에서는 무지막지하게 모래를 퍼내가고 산에서는 골재 채취하기를 수십년 반복하더니 결국은 댐을 만들어 물속에 그 흔적을 고스란히 묻어버렸다.
그런 아픈 흔적이 가득한 상처투성이 땅이 바로 이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정상배와 결탁한 장사치들이 퍼내간 모래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마을이 있던 터에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기도 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은 자연을 철저히 수탈해먹기만 했다. 자동차가 멈추어 서 있는그 아래에 친구가 살았던 집이 있었다.
그 친구를 못본지가 50년은 족히 된듯하다. 중앙선 철길을 다 걷어낸 흔적만 남았다.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옛 산천만 남았는데 그 산천도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구만이(혹은 구마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역마을로 이어지는 고갯마루에 섰다. 옛날을 되돌아보면 이 부근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누워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갯길을 따라 내려갔더니 모든 것을 삼켜버린 호수가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부근에는 삵이 살았다고 했다. 밤중에 사람이 지나가면 흙을 퍼붓는다고도 했다. 그런 고개도 이젠 훨씬 낮아져버렸다.
3년전에만 해도 이랬던 곳이었는데.....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할말이 있으랴?
나는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그냥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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